왕을 광고 모델로 쓴 고무신 회사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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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6. 중림동 155번지, 대륙고무주식회사
6. 중림동 155번지, 대륙고무주식회사
여름방학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신창이다. 1호선의 종착역이라서 전철을 타고도 고향에 갈만한 거리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은 가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동네에 순천향대학교가 들어선 뒤로 반은 도시, 반은 농촌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은 여느 시골 동네처럼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골에 가면 ’서울에서 온 도련님‘이라고, 먼 나라에 유학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대우받았다.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사셨지만 우리 집은 셋방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시골에 내려갈 때 꽃단장을 시키셨다. 꽃단장이란 새 운동화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운동화는 '서울 사람'의 상징과 같아서 코흘리개 시골 아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촌 형들은 나를 동네의 만만한 꼬마들과 이유 없이 싸움 붙였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우다가 원두막에서 방학 숙제도 하고 덜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하기도 했다. 냇가에서 송사리와 붕어를 잡을 때 사촌 형들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이용했다. 운동화를 신은 나는 물에 젖을까 봐 한쪽 모래톱에 벗어 놓고 들어갔지만, 형들은 고무신을 신고 물에 들어갔다. 물 묻은 고무신은 뜨거운 햇빛에 말라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고무신은 작은 물고기를 넣으면 어항이 되고, 모래를 수북이 쌓으면 장난감 자동차도 되었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14년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최장수 만화 '검정 고무신'은 그 시절 이야기다. 검정 고무신은 우리에게 추억의 존재다.
그 고무신 공장이 모여있던 곳이 중림동이었다. 현재 중림동의 중심지인 중림종합사회복지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이 동네 역사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25개의 고무신 공장이 있었는데 자그만치 8개가 중림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이 자리,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중림동 155번지에 있던 대륙고무주식회사였다. 고무신을 신기 전에는 모두가 짚신을 신고 다녔다.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떠나는 선비의 괴나리봇짐에는 의례 짚신 너덧 짝이 대롱거렸다. 그러나 짚신은 너무 빨리 닳았다. 볏짚으로 만든 탓에 사나흘 신으면 헤지는데다 비가 오면 축축해지고 진흙이 달라붙어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에 반해 고무신은 1년 이상 신을 만큼 내구성이 뛰어나고 물기도 금세 마르는 신비로운 신발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일본의 고무업계는 우리나라에 고무신 공장을 세웠다. 1921년부터 1년여간 경성(서울)에서만 고무신 88만 켤레가 팔렸는데 일본 수입품이 70만 켤레, 나머지는 조선 제조품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1일자). 일본이 만든 고무신을 '호모화'라 했다.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다. 호모화의 바닥은 고무였지만 옆면에는 천이나 가죽을 덧대 값이 비쌌다. 서민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발이었다.
이를 오늘과 같은 고무신 모양으로 바꿔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이가 이병두(李丙斗)라는 조선인이다. 그는 고무의 편리성에 착안하고 일본 호모화의 문제점과 원인을 파악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 모양을 본뜨고 발볼을 넓게 해 편리성을 주고, 발등을 드러내 우리의 체질과 환경에 적합한 '조선식 고무신'으로 탈바꿈시켰다.
여자 고무신도 개량했는데 앞머리가 볼록하게 솟아오른 코신을 본떠 양반 여인네의 가죽신 모양으로 만들었다. 신발의 모든 소재를 고무로 통일해 생산도 편하고 단가도 확 낮추었다. 이 고무신은 출시하자마자 대박을 냈다.
고무신 공장 중 대표적인 회사가 대륙고무공업(주)와 반도고무공업소였다. 두 곳 모두 중림동에 있었다. ‘대장군'이라는 브랜드로 고무신을 만들던 대륙고무공업(주)은 처음엔 원효로에 있다 1932년 이 자리로 이사 오게 된다. 반도고무공업소는 중림동 147번지, 지금의 약현성당 후문 쪽 가톨릭 출판사 자리에 있었다. 고무신 회사의 양대 산맥이 중림동, 이 성문 밖 첫 동네에 이웃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고무의 사장은 이하영(李夏永, 1858~1929) 대감이다. 당시 조선에서 돈 냄새를 가장 잘 맡고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소개는 다음 편으로 미룬다.
지금은 중림동 종합사회복지관 근처를 아무리 돌아봐도 고무신 공장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근처의 퇴락한 붉은 벽돌 건물이 철거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 저 건물도 중림동에 여러 채 있었다는 고무신 공장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보니 대륙고무 공장의 붉은 벽돌 건물이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대륙고무공업은 자본금 규모 면에서도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주주를 500명이나 모았고 자본금이 무려 50만 원, 지금 돈으로 500억 정도라 한다. 주주 중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서형(庶兄, 의붓형) 이윤용(李允用 1854~1939)이 있었다. 이윤용은 1929년 이하영이 사망하자 이하영 대감의 아들 이규원과 함께 공동대표가 된다.
1907년 이곳에 이완용이 터를 잡고 살았는데, 이완용의 형 이윤용이 주주로 참여한 것이 과거 동생 이완용이 살던 이 지역의 연고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하영과 이완용은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 아래서 각료를 한 동갑내기라 무척 친했고, 이윤용은 이완용의 서형으로 동생의 후견인 노릇을 톡톡히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1922년 9월 동아일보에 광고를 실었다. "대륙 고무가 제조한 고무화의 출매함이 이왕(李王) 전하께서 이용하심에 황감을 비롯하야…" 그의 마케팅 방법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왕 전하가 누구인가? 고종은 1919년 승하한지 오래니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다. 마케팅에 왕을 활용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신발 광고 모델이 된 것이다.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유명 연예인의 액세서리가 날개 돋친 듯 팔리지 않는가? 순종이 신고 다니는 고무신이라니… '비운의 왕' 순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마케팅으로 연결한 것이다. 어떤 감언이설로 순종을 고무신 마케팅에 끌어들였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회사는 해방 이후에도 고무신을 생산하다 1970년대에 화재로 공장 일부가 소실됐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고무공장의 붉은 벽돌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표식도 없다. 역사는 공간에서 추억하고, 흔적으로 마음에 각인된다는데…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시골에 가면 ’서울에서 온 도련님‘이라고, 먼 나라에 유학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대우받았다.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사셨지만 우리 집은 셋방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시골에 내려갈 때 꽃단장을 시키셨다. 꽃단장이란 새 운동화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운동화는 '서울 사람'의 상징과 같아서 코흘리개 시골 아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촌 형들은 나를 동네의 만만한 꼬마들과 이유 없이 싸움 붙였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우다가 원두막에서 방학 숙제도 하고 덜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하기도 했다. 냇가에서 송사리와 붕어를 잡을 때 사촌 형들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이용했다. 운동화를 신은 나는 물에 젖을까 봐 한쪽 모래톱에 벗어 놓고 들어갔지만, 형들은 고무신을 신고 물에 들어갔다. 물 묻은 고무신은 뜨거운 햇빛에 말라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고무신은 작은 물고기를 넣으면 어항이 되고, 모래를 수북이 쌓으면 장난감 자동차도 되었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14년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최장수 만화 '검정 고무신'은 그 시절 이야기다. 검정 고무신은 우리에게 추억의 존재다.
그 고무신 공장이 모여있던 곳이 중림동이었다. 현재 중림동의 중심지인 중림종합사회복지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이 동네 역사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25개의 고무신 공장이 있었는데 자그만치 8개가 중림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이 자리,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중림동 155번지에 있던 대륙고무주식회사였다. 고무신을 신기 전에는 모두가 짚신을 신고 다녔다.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떠나는 선비의 괴나리봇짐에는 의례 짚신 너덧 짝이 대롱거렸다. 그러나 짚신은 너무 빨리 닳았다. 볏짚으로 만든 탓에 사나흘 신으면 헤지는데다 비가 오면 축축해지고 진흙이 달라붙어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에 반해 고무신은 1년 이상 신을 만큼 내구성이 뛰어나고 물기도 금세 마르는 신비로운 신발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일본의 고무업계는 우리나라에 고무신 공장을 세웠다. 1921년부터 1년여간 경성(서울)에서만 고무신 88만 켤레가 팔렸는데 일본 수입품이 70만 켤레, 나머지는 조선 제조품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1일자). 일본이 만든 고무신을 '호모화'라 했다.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다. 호모화의 바닥은 고무였지만 옆면에는 천이나 가죽을 덧대 값이 비쌌다. 서민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발이었다.
이를 오늘과 같은 고무신 모양으로 바꿔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이가 이병두(李丙斗)라는 조선인이다. 그는 고무의 편리성에 착안하고 일본 호모화의 문제점과 원인을 파악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 모양을 본뜨고 발볼을 넓게 해 편리성을 주고, 발등을 드러내 우리의 체질과 환경에 적합한 '조선식 고무신'으로 탈바꿈시켰다.
여자 고무신도 개량했는데 앞머리가 볼록하게 솟아오른 코신을 본떠 양반 여인네의 가죽신 모양으로 만들었다. 신발의 모든 소재를 고무로 통일해 생산도 편하고 단가도 확 낮추었다. 이 고무신은 출시하자마자 대박을 냈다.
고무신 공장 중 대표적인 회사가 대륙고무공업(주)와 반도고무공업소였다. 두 곳 모두 중림동에 있었다. ‘대장군'이라는 브랜드로 고무신을 만들던 대륙고무공업(주)은 처음엔 원효로에 있다 1932년 이 자리로 이사 오게 된다. 반도고무공업소는 중림동 147번지, 지금의 약현성당 후문 쪽 가톨릭 출판사 자리에 있었다. 고무신 회사의 양대 산맥이 중림동, 이 성문 밖 첫 동네에 이웃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고무의 사장은 이하영(李夏永, 1858~1929) 대감이다. 당시 조선에서 돈 냄새를 가장 잘 맡고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소개는 다음 편으로 미룬다.
지금은 중림동 종합사회복지관 근처를 아무리 돌아봐도 고무신 공장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근처의 퇴락한 붉은 벽돌 건물이 철거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 저 건물도 중림동에 여러 채 있었다는 고무신 공장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보니 대륙고무 공장의 붉은 벽돌 건물이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대륙고무공업은 자본금 규모 면에서도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주주를 500명이나 모았고 자본금이 무려 50만 원, 지금 돈으로 500억 정도라 한다. 주주 중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서형(庶兄, 의붓형) 이윤용(李允用 1854~1939)이 있었다. 이윤용은 1929년 이하영이 사망하자 이하영 대감의 아들 이규원과 함께 공동대표가 된다.
1907년 이곳에 이완용이 터를 잡고 살았는데, 이완용의 형 이윤용이 주주로 참여한 것이 과거 동생 이완용이 살던 이 지역의 연고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하영과 이완용은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 아래서 각료를 한 동갑내기라 무척 친했고, 이윤용은 이완용의 서형으로 동생의 후견인 노릇을 톡톡히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1922년 9월 동아일보에 광고를 실었다. "대륙 고무가 제조한 고무화의 출매함이 이왕(李王) 전하께서 이용하심에 황감을 비롯하야…" 그의 마케팅 방법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왕 전하가 누구인가? 고종은 1919년 승하한지 오래니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다. 마케팅에 왕을 활용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신발 광고 모델이 된 것이다.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유명 연예인의 액세서리가 날개 돋친 듯 팔리지 않는가? 순종이 신고 다니는 고무신이라니… '비운의 왕' 순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마케팅으로 연결한 것이다. 어떤 감언이설로 순종을 고무신 마케팅에 끌어들였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회사는 해방 이후에도 고무신을 생산하다 1970년대에 화재로 공장 일부가 소실됐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고무공장의 붉은 벽돌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표식도 없다. 역사는 공간에서 추억하고, 흔적으로 마음에 각인된다는데…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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