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보다 강렬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어떻게 세계를 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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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옹켄센·작가 배삼식 단독 인터뷰]
"우린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EIF 초청 공연서 기립박수 받은 창극
신화와 고전의 재해석으로 세계 무대에서 기립박수
"오페라, 한국식 뮤지컬과 전혀 다른 하나의 장르다"
"우린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EIF 초청 공연서 기립박수 받은 창극
신화와 고전의 재해석으로 세계 무대에서 기립박수
"오페라, 한국식 뮤지컬과 전혀 다른 하나의 장르다"
얼마 전 세계 최대 공연 축제인 영국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에 초청받은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지난 9~11일 공연 후 국내외로 화제가 됐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EIF의 관객들이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낯선 창극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을 비롯한 해외 언론에선 공연에 '별 다섯개' 리뷰를 쏟아냈다.
이 작품의 연출은 싱가포르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옹켄센이 맡았고, 극본은 국내 연극계에서 가장 이름값이 높은 작가 배삼식이 썼다. 작품의 '부모'와도 같은 두 사람을 공연이 열린 에든버러 페스티벌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인터뷰했다.
이들은 공연에 대한 반응이 이토록 뜨거울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한다. 옹켄센은 "EIF는 관객층이 주로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이뤄져 있어 상대적으로 극 장르가 큰 인기를 끌기 쉽지 않은 편"이라며 "서양 오페라와 다른 판소리만의 감정적이고 강렬한 특징이 그들에게 굉장히 새롭게 다가간 듯하다"고 말했다.
옹켄센은 앞서 1998년 첫 방한 때 안숙선 명창이 연기한 '춘향'을 보고 처음 판소리를 접했다. 그는 "판소리는 '미니멀'하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별다른 반주 없이 고수가 치는 북 장단에 맞춰 소리꾼의 목소리로 온전히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그러면서도 감정적으로 강렬하다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 전쟁 신화에서 주목받지 못한 트로이 여인들의 목소리를 담아 쓰고, 장 폴 사르트르가 각색한 동명의 작품이 원작이다. 배삼식은 원작을 단순히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새로 썼다.
그는 "극중 노예 출신 여인들이 '우리는 지옥에서 지옥으로 건너갈 뿐'이라고 한탄하는 장면은 원작에선 없고 새로 쓴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어 "판소리로 불러야 하는 글이기 때문에 3·4조, 4·4조 등 판소리의 기본 율격에 맞춰서 쓰되, 코러스가 아카펠라로 부르는 부분은 현대적인 어법으로 쓰는 등 각각의 소리에 맞는 글을 썼다"고 덧붙였다.
공연 중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등장할 때나 그리스 군이 안드로마케의 갓난아기를 죽이고 방패에 시체를 올려 가져다주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자 "짜릿했다"고 한다. 배삼식은 "사실 판소리는 사투리나 비속어 등을 사용하면서 '말맛'이 사는 음악인데, 이를 영어 자막으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자막이 기본적인 뜻만 전달하게 돼 있는데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의도한 뉘앙스를 관객이 잘 따라오고 있다는 걸 느껴서 작가로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옹켄센과 배삼식은 작품 기획 단계에서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오랜 대화를 통해 "신은 무엇인가"란 질문이 나왔고, 이에 "현대사회에선 권력을 가진 자가 곧 신이다"란 대답이 내려졌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신들의 장난에 의해 삶이 파괴된 트로이 여인들의 삶은 현대 사회에서 부당한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다"며 "그렇게 수천 년 전 그리스 신화에 생명력을 부여했다"고 강조했다.
창극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선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옹켄센은 "창극이 '한국식 뮤지컬'로 알려지거나 자칫 그 방향으로 변화하는 건 위험하다"며 "뮤지컬·오페라와 일종의 음악극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대형 오케스트라 반주나 화려한 무대 등을 배제한 창극만의 고유의 형식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판소리와 창극의 순수한 원형을 무대에서 보존할수록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코리안 뮤지컬(Korean Musical)'이 아니라 '창극' 그 자체로 세계 관객들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이 해외 진출보다는 한국 관객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도 한국적 정체성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해외 관객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는 평가다.
배 작가는 "극본을 쓸 때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창극이란 전통적인 장르를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싶단 생각이 먼저였다"며 "판소리라는 전통 형식이 가진 잠재성과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텍스트가 만나면 어느 문화권의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에든버러=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이 작품의 연출은 싱가포르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옹켄센이 맡았고, 극본은 국내 연극계에서 가장 이름값이 높은 작가 배삼식이 썼다. 작품의 '부모'와도 같은 두 사람을 공연이 열린 에든버러 페스티벌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인터뷰했다.
"판소리는 '미니멀'하면서도 강렬한 매력"
이들은 공연에 대한 반응이 이토록 뜨거울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한다. 옹켄센은 "EIF는 관객층이 주로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이뤄져 있어 상대적으로 극 장르가 큰 인기를 끌기 쉽지 않은 편"이라며 "서양 오페라와 다른 판소리만의 감정적이고 강렬한 특징이 그들에게 굉장히 새롭게 다가간 듯하다"고 말했다.
옹켄센은 앞서 1998년 첫 방한 때 안숙선 명창이 연기한 '춘향'을 보고 처음 판소리를 접했다. 그는 "판소리는 '미니멀'하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별다른 반주 없이 고수가 치는 북 장단에 맞춰 소리꾼의 목소리로 온전히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그러면서도 감정적으로 강렬하다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 전쟁 신화에서 주목받지 못한 트로이 여인들의 목소리를 담아 쓰고, 장 폴 사르트르가 각색한 동명의 작품이 원작이다. 배삼식은 원작을 단순히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새로 썼다.
그는 "극중 노예 출신 여인들이 '우리는 지옥에서 지옥으로 건너갈 뿐'이라고 한탄하는 장면은 원작에선 없고 새로 쓴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어 "판소리로 불러야 하는 글이기 때문에 3·4조, 4·4조 등 판소리의 기본 율격에 맞춰서 쓰되, 코러스가 아카펠라로 부르는 부분은 현대적인 어법으로 쓰는 등 각각의 소리에 맞는 글을 썼다"고 덧붙였다.
공연 중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등장할 때나 그리스 군이 안드로마케의 갓난아기를 죽이고 방패에 시체를 올려 가져다주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자 "짜릿했다"고 한다. 배삼식은 "사실 판소리는 사투리나 비속어 등을 사용하면서 '말맛'이 사는 음악인데, 이를 영어 자막으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자막이 기본적인 뜻만 전달하게 돼 있는데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의도한 뉘앙스를 관객이 잘 따라오고 있다는 걸 느껴서 작가로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옹켄센과 배삼식은 작품 기획 단계에서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오랜 대화를 통해 "신은 무엇인가"란 질문이 나왔고, 이에 "현대사회에선 권력을 가진 자가 곧 신이다"란 대답이 내려졌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신들의 장난에 의해 삶이 파괴된 트로이 여인들의 삶은 현대 사회에서 부당한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다"며 "그렇게 수천 년 전 그리스 신화에 생명력을 부여했다"고 강조했다.
"창극, 세계적 경쟁력 갖춰"
창극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선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옹켄센은 "창극이 '한국식 뮤지컬'로 알려지거나 자칫 그 방향으로 변화하는 건 위험하다"며 "뮤지컬·오페라와 일종의 음악극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대형 오케스트라 반주나 화려한 무대 등을 배제한 창극만의 고유의 형식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판소리와 창극의 순수한 원형을 무대에서 보존할수록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코리안 뮤지컬(Korean Musical)'이 아니라 '창극' 그 자체로 세계 관객들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이 해외 진출보다는 한국 관객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도 한국적 정체성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해외 관객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는 평가다.
배 작가는 "극본을 쓸 때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창극이란 전통적인 장르를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싶단 생각이 먼저였다"며 "판소리라는 전통 형식이 가진 잠재성과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텍스트가 만나면 어느 문화권의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에든버러=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