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미슐랭 셰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을 지켜보며 노하우를 전수받을 기회가 있다면? 초년병 요리사에게는 최고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그런 자리가 있다. 1994년부터 매년 여름 스위스 알프스의 산중턱에서 열리는 '베르비에 페스티벌' 이야기다.

지난달 14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이 페스티벌의 모토는 대가들의 지혜와 경험을 젊은 음악가들과 나누는 것이다. 젊은 음악가들이 이 축제를 기다리를 이유다. 오디션을 통해 세계 각지의 젊은 단원으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페스티벌 기간 내내 거장들과 함께 음악을 만든다. '컨덕팅 펠로우십' 프로그램도 그 일환이다. 이는 35세 이하의 젊은 지휘자들 중 3~5명을 선발해 기라성같은 마에스트로 곁에서 지휘를 보조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축제에서 한국인중 유일하게 컨덕팅 펠로우십에 선정된 지휘자 최재혁(29)이 올해 축제 분위기를 문화예술 플랫폼 '아르떼'에 전했다. 300~400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선발된 그는 주빈 메타·다니엘레 가티·플라시도 도밍고·클라우스 메켈레·라하브 샤니·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등 말 그대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을 도왔다.
'젊은 지휘자' 최재혁 "눈처럼 투명한 마에스트로 꿈꿔요"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다니엘레 가티와 함께 한 한국인 지휘자 최재혁. 최재혁 제공


지난 2주 동안 최재혁은 이들의 노하우를 빠르게 흡수했다. 그는 "베르디 레퀴엠을 지휘하는 다니엘레 가티의 카리스마는 리허설 때마다 실전을 방불케 했다"며 "지휘자의 카리스마는 음악을 대하는 진심과 모든 것을 쏟아붓는 모습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다니엘레 가티는 '세계 3대 오케스트라'에 꼽히는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에 이어 내년부터 독일 대표 명문 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이끄는 세계적인 지휘자다.

"다니엘레 가티는 음표와 리듬 그리고 화성 뒤에 숨어있는 작곡가의 의도를 함께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휘자에요.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음악을 이끌어야 하는지 세심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주빈 메타는 기본기를 강조했고, 플라시도 도밍고는 화성과 색채를 중요하게 여기더군요. 메켈레와 에센바흐를 보면서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완전히 달라지는구나'란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마에스트로 외에도 전설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피아니스트 에브기니 키신 등 축제에 참여한 최정상급 연주자들과 나눈 대화도 자양분이 됐다고 했다.

"마이스키에게 연주 비결을 묻자 '음악을 한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하더군요. 키신은 온종일 음악 이야기만 했구요. '이들에겐 삶이 곧 음악'이란 걸 느꼈습니다. 음악을 향한 이들의 순수함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그는 어느덧 8년차 지휘자가 됐다. 20대 초반이던 2015년 유럽의 그라네페크 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2018년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사이먼 래틀과 함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뉴질랜드에서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며 마에스트로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유스 오케스트라의 첫 리허설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에너지가 저를 압도했고 그걸 빚어낸 작곡가와 지휘자에 흠뻑 빠졌죠."

이후 미국 월넛힐 예술고와 줄리어드 음대에서 작곡을 배웠다. 대다수 학교가 학부 과정 이상부터 지휘과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선 작곡을 전공했다. 지휘는 학교 바깥에서 배웠다.
'젊은 지휘자' 최재혁 "눈처럼 투명한 마에스트로 꿈꿔요"
2018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사이먼 래틀(오른쪽), 던킨 와드(왼쪽)와 한 무대에 오른 최재혁

그는 작곡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췄다. 2017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역대 최연소(23세)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제네바 콩쿠르는 작곡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2015년부터 앙상블블랭크를 창단해 음악감독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현대작품을 주로 공연하는 이 앙상블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작곡 활동이 지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그는 설명했다. 구스타프 말러, 레너드 번스타인, 피에르 불레즈,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모두 작곡자 겸 지휘자였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역시 말년에는 지휘자로도 활약했는데 자신이 20대 작곡한 불새와 봄의 제전을 간소화하게 하는 작업을 했다. 초판과 소리는 같지만 악보 표기는 훨씬 간소해졌다고.

"작곡과 지휘는 완전히 다르죠. 하지만 둘을 섞으면 장점이 생깁니다. 지휘자의 시선으로 작곡하면 실제 연주 상황을 반영할 수 있죠. 반대로 작곡가의 입장에서 지휘를 하면 곡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클래식 음악계에는 "지휘자는 모든 음악가 중 가장 늦게 꽃 핀다"는 말이 있다. 악기가 아닌 악기 연주자를 이끌려면 충분한 경륜과 카리스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대인 최재혁이 앞으로 채워가야할 일이다.

최재혁은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작곡가를 대변하는 것'을 꼽았다. "작곡가가 셰프라면 지휘자는 그 음식을 식지않게 전달하는 웨이터다."란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말과 비슷한 얘기다.

"단원들이 함께하고 싶어하는 지휘자는 대개 비슷합니다.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할 뿐 자신은 '투명인간'이 되려는 지휘자죠. 눈이 손에 떨어지면 체온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요. 음악에 나만의 이고(ego)를 얹으려는 지휘자가 아닌 작곡가와 단원들을 하나로 잇는 지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