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변동림이자 김향안, 두 개의 존재로 완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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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뮤지컬 영화 '커버 걸(Cover Girl)'(1944)에서 나이트클럽 매니저 대니(진 켈리)는 소속 댄서이자 연인인 러스티(리타 헤이워드)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러스티가 유명 웨딩 잡지의 커버 걸로 데뷔한 후 빼어난 미모와 춤 실력으로 큰 사랑을 받게 되자 진짜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스타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러스티의 선택을 존중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옆에 두고 싶은 대니. 고민하며 밤길을 걷던 대니는 갑자기 상점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다른 자아(alter ego)가 분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진심으로 러스티를 사랑한다면 보내줘야 한다고 대니를 압박하더니, 급기야 유리창 밖으로 튀어나와 대니와 함께 춤을 춘다.
정확히 같은 춤을 추고 있지만 어쩐지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로 대니를 압박하는 그. 대니는 견디다 못해 그를 다시 유리창 안으로 밀어 넣고 상점의 유리를 깨버린다. 이로써 그는 사라졌지만 대니는 예민한 뒷모습을 보이며 가던 길을 간다. 이제 대니에게 진짜 결단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작된 뮤지컬 영화 '커버 걸'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보수적이고 낭만적인 젠더 감수성을 갖고 있지만 '라라랜드'와 '멤피스'의 문제의식으로 발전되는 이슈를 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것은 대니의 분리된 자아가 서로 대결하는 모습이다. 뮤지컬, 특히 한국 창작 뮤지컬은 한 인물의 자아를 둘 이상으로 나눠 그들이 갈등하고 대결하며 서로 파괴하려다 벌어지는 사건을 자주 다룬다.
혹은 반대로 인물들이 서로 동일시 상태에서 욕망과 집착, 가스라이팅과 연민, 그리고 동성애적 감정이 뒤섞인 사건을 겪기도 한다. '지킬 앤 하이드'는 물론이고, '쓰릴 미', '트레이스 유', '인터뷰', '더 픽션', '트레드 밀',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와 같은 작품이 모두 이러한 자장 안에 놓여 있다. '라흐 헤스트'의 변동림과 김향안은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들 역시 한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인물들이지만 서로 갈등하거나 파괴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언니와 동생처럼, 그리고 때로는 친구처럼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암시적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중요한 선택에 앞서 고민을 털어놓다가 진짜 속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그들의 언어는 위협과 강요가 아니라, 은유와 상징 그리고 이해와 포용으로 가득 차 있다.
변동림과 김향안은 실존인물 변동림/김향안으로부터 생애주기별로 분리된 존재들이다. 변동림은 시인 이상과 결혼한 20대의 그녀이며, 김향안은 화가 김환기와 결혼한 이후의 삶을 사는 그녀다. 이들의 분리는 다음과 같은 삶에 대한 질문과 성찰을 위한 것이다.
왜 우리는 때로 실패로 귀결되었던 과거의 선택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일까. 만약 같은 선택을 한다면 현재의 나도 실패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나는 실패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과거의 나를 부정해야 현재의 내가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라흐 헤스트'는 동림과 향안을 통해, 우리의 삶은 선택의 순간이 모여 구성되는 것이며 모든 선택을 내렸던 당시의 ‘나’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동림은 향안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경쾌하고 단단하다. 동림은 1930년대 예술가들의 아지트 낙랑파라(樂浪parlour)에 드나들면서도 낭만과 무위보다 독서를 즐긴다.
이상은 동림의 이런 모습에 반해 옆 테이블에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리지만 동림은 난해한 이상 시를 매번 명쾌하게 해석하여 이상의 마음을 더욱 산다. 동림의 이러한 태도는 이상과 결혼한 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들은 가난했고 이상은 3개월 만에 일본으로 가버렸지만 동림은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림은 일본에서 사망한 이상의 유해를 홀로 들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향안은 동림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또 다시 예술가-환기와 가까워지면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동림이 모든 불안함과 고통을 안고 일본에서 부랑자처럼 살고 있는 이상에게 가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 삶을 환기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김환기의 아호 ‘향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 변동림에서 김향안이 된다.
자신 안에 환기의 이름을 품고 ‘우리’로 사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향안은 환기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후원하는 동반자가 된다. 이런 향안의 모습에는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으로 이상을 데려가 그가 시를 완성하도록 도운 동림의 모습이 겹쳐있다. 희생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응원과 배려가 ‘같은’ 선택으로 이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향안은 동림을 결국 깨닫는다. 동림과 만나고 동림을 알게 되면서, 과거의 나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연을 마주했던 최초의 순간에 노년의 향안이 왜 화가로 살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환기는 죽고 없지만, 화가로 살며 환기를 느낌과 동시에 예술을 꿈으로 품는 완전한 삶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향안의 얼굴로 “나는 변동림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환기와의 첫 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변동림/김향안의 예술적 삶이다. 내가 나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예술적 순간이, 동림과 향안이라는 두 인물에게서 이처럼 펼쳐져 있다.
겉으로는 러스티의 선택을 존중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옆에 두고 싶은 대니. 고민하며 밤길을 걷던 대니는 갑자기 상점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다른 자아(alter ego)가 분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진심으로 러스티를 사랑한다면 보내줘야 한다고 대니를 압박하더니, 급기야 유리창 밖으로 튀어나와 대니와 함께 춤을 춘다.
정확히 같은 춤을 추고 있지만 어쩐지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로 대니를 압박하는 그. 대니는 견디다 못해 그를 다시 유리창 안으로 밀어 넣고 상점의 유리를 깨버린다. 이로써 그는 사라졌지만 대니는 예민한 뒷모습을 보이며 가던 길을 간다. 이제 대니에게 진짜 결단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작된 뮤지컬 영화 '커버 걸'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보수적이고 낭만적인 젠더 감수성을 갖고 있지만 '라라랜드'와 '멤피스'의 문제의식으로 발전되는 이슈를 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것은 대니의 분리된 자아가 서로 대결하는 모습이다. 뮤지컬, 특히 한국 창작 뮤지컬은 한 인물의 자아를 둘 이상으로 나눠 그들이 갈등하고 대결하며 서로 파괴하려다 벌어지는 사건을 자주 다룬다.
혹은 반대로 인물들이 서로 동일시 상태에서 욕망과 집착, 가스라이팅과 연민, 그리고 동성애적 감정이 뒤섞인 사건을 겪기도 한다. '지킬 앤 하이드'는 물론이고, '쓰릴 미', '트레이스 유', '인터뷰', '더 픽션', '트레드 밀',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와 같은 작품이 모두 이러한 자장 안에 놓여 있다. '라흐 헤스트'의 변동림과 김향안은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들 역시 한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인물들이지만 서로 갈등하거나 파괴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언니와 동생처럼, 그리고 때로는 친구처럼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암시적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중요한 선택에 앞서 고민을 털어놓다가 진짜 속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그들의 언어는 위협과 강요가 아니라, 은유와 상징 그리고 이해와 포용으로 가득 차 있다.
변동림과 김향안은 실존인물 변동림/김향안으로부터 생애주기별로 분리된 존재들이다. 변동림은 시인 이상과 결혼한 20대의 그녀이며, 김향안은 화가 김환기와 결혼한 이후의 삶을 사는 그녀다. 이들의 분리는 다음과 같은 삶에 대한 질문과 성찰을 위한 것이다.
왜 우리는 때로 실패로 귀결되었던 과거의 선택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일까. 만약 같은 선택을 한다면 현재의 나도 실패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나는 실패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과거의 나를 부정해야 현재의 내가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라흐 헤스트'는 동림과 향안을 통해, 우리의 삶은 선택의 순간이 모여 구성되는 것이며 모든 선택을 내렸던 당시의 ‘나’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동림은 향안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경쾌하고 단단하다. 동림은 1930년대 예술가들의 아지트 낙랑파라(樂浪parlour)에 드나들면서도 낭만과 무위보다 독서를 즐긴다.
이상은 동림의 이런 모습에 반해 옆 테이블에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리지만 동림은 난해한 이상 시를 매번 명쾌하게 해석하여 이상의 마음을 더욱 산다. 동림의 이러한 태도는 이상과 결혼한 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들은 가난했고 이상은 3개월 만에 일본으로 가버렸지만 동림은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림은 일본에서 사망한 이상의 유해를 홀로 들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향안은 동림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또 다시 예술가-환기와 가까워지면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동림이 모든 불안함과 고통을 안고 일본에서 부랑자처럼 살고 있는 이상에게 가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 삶을 환기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김환기의 아호 ‘향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 변동림에서 김향안이 된다.
자신 안에 환기의 이름을 품고 ‘우리’로 사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향안은 환기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후원하는 동반자가 된다. 이런 향안의 모습에는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으로 이상을 데려가 그가 시를 완성하도록 도운 동림의 모습이 겹쳐있다. 희생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응원과 배려가 ‘같은’ 선택으로 이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향안은 동림을 결국 깨닫는다. 동림과 만나고 동림을 알게 되면서, 과거의 나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연을 마주했던 최초의 순간에 노년의 향안이 왜 화가로 살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환기는 죽고 없지만, 화가로 살며 환기를 느낌과 동시에 예술을 꿈으로 품는 완전한 삶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향안의 얼굴로 “나는 변동림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환기와의 첫 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변동림/김향안의 예술적 삶이다. 내가 나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예술적 순간이, 동림과 향안이라는 두 인물에게서 이처럼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