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1955, 캔버스에 유화물감, 65x165cm,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1955, 캔버스에 유화물감, 65x165cm, 국립현대미술관
화가 장욱진(1917~1990)은 평생 가족을 그렸다. 아픈 막내 아들도, 가난한 화가 곁에서 생계를 책임지던 아내도, 아늑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행복한 순간도, 장욱진에겐 예술적 순간 됐다.

30여점 이상 가족 그림을 남긴 장욱진에겐 평생의 한이 하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린 가족도이자, 생애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 그림'. 1955년작 '가족'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1964년 반도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그는 이 작품을 일본인 시오자와 사다오에게 판매한 뒤 아쉬워하다 1972년 '가족도'를 다시 그렸다. 당시 그림을 판 돈으론 막내딸의 바이올린을 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욱진 최초의 가족 그림이 최근 발굴돼 6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일본에서 '가족'을 발굴해 다음 달 14일 덕수궁관에서 개막하는 장욱진 회고전에서 전시한다고 16일 밝혔다.

일본 소장자 옷장 속 먼지에 파묻혀 있었다

〈가족도〉, 1972, 캔버스에 유화물감, 75×14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가족도〉, 1972, 캔버스에 유화물감, 75×14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60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9월 장욱진 회고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굴됐다. 전시 기획을 맡은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시오자와의 아들 부부를 찾아 일본 오사카 근교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배 학예연구사는 낡은 벽장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작품을 찾아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가를 설득해 이 작품을 구입했다. 보존 처리를 마친 후 장욱진 회고전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옷장에서 발견한 장욱진의 첫 '가족'
옷장에서 발견한 장욱진의 첫 '가족'
한가운데 있는 집 안에 4명의 가족이 앞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과 함께 나무, 두 마리의 새를 그린 이 작품은 가로 16.5cm, 세로 6.5cm 크기의 작은 그림이다. 장욱진은 이 그림을 그린 뒤 너무 마음에 들어 팔리기 전까지 머리맡에 걸어뒀다고. 작은 그림이지만 대상이 짜임새 있게 배치돼 장욱진의 조형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장욱진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작품의 액자 틀을 월북 조각가 박승구(1919~1995)가 조각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엔 아내가 없다. 그가 그린 가족도 중 아버지와 아이들만이 함께 그려진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이 평생 가족 이미지를 그린 장욱진 가족도의 전범(典範)이 되는 그림이자 최초의 정식 가족도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장욱진의 큰딸인 장경수씨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그리신 나무의 우둘투둘한 질감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봤던 기억이 난다"면서 "다시 만나니 눈물이 난다"고 소감을 전했다.
배원정 학예연구사와 시오자와 슌이치 부부
배원정 학예연구사와 시오자와 슌이치 부부
이 작품을 두고 화가의 부인 고(故) 이순경 여사는 “조그마한 가족도였는데 두고두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언급했고, 큰딸 역시 이 작품을 장욱진의 대표작으로 꼽았던 바 있다. 생전 장욱진과 깊은 친분을 유지했던 김형국 전 서울대 교수는 1991년 이 그림의 행방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작품의 현존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무소유…동심의 화가 장욱진은 누구인가


장욱진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사랑받는 대표적인 작가다.
다음달 14일 개막하는 회고전에서는 초기 작품부터 유화, 먹그림, 매직펜 드로잉, 판화, 표지화, 삽화 등을 소개한다.
<가족> 1973, 캔버스에 유화, 13.5X 20cm, 개인소장.
<가족> 1973, 캔버스에 유화, 13.5X 20cm, 개인소장.
장욱진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깊은 족적을 남긴 서양화가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한국적이며 민속적이다. 살아생전 그는 "나는 심플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무, 집, 해와 달, 까치 등이 단순하고 간결하게 등장하는 그림으로 '동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는 서울이 시끄럽다고 늘 시골로만 다녔다. 덕소와 수안보, 신갈 등 사람 없고 고요한 곳을 찾았다. 외부 세계와 연결 고리를 모두 차단하고 그저 빈 시간을 위해 싸웠다. 욕심 많은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소유를 주장하며 제도권 생활을 완전히 포기했다. 어슴프레한 새벽이 찾아올 때 그는 붓을 잡았다.
<가족> 1976, 13.7x17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가족> 1976, 13.7x17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그의 그림 속엔 우리가 사는 평범한 모습이 담겨 있다. 해가 있고, 달이 있고, 아이들과 강아지가 논다. 당시 진취적인 화가들이 추상화 쪽으로 화풍을 옮겨가고 있을 때,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고 그의 그림 세계를 구축했다. 가족 그림을 끊임없이 그린 것은 미안함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평생 가족을 돌보지 않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방기한 미안함과 아이까지 병들게 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화가 대신 생계를 책임지는 부인에 대한 깊은 고마움이 담긴다.
60년 행방불명 됐던 장욱진의 첫 '가족'...일본서 60년 만에 귀환
장욱진의 막내딸 장윤미는 “당시 10살이었는데 혜화국민학교 합주단이었다. 아버지가 사준 그 바이올린으로 여러 곳에서 연주한 기억도 생생하다. ( 그 그림이 귀국한다니) 너무나 새롭고 감격스럽게 다가온다”고 소감을 전했다.

약 6개월 간의 대장정 끝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된 장욱진의 첫 '가족'은 보존 처리 과정을 마친 후 9월 14일부터 개최되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에 출품될 예정이다. 1972년 이 그림을 회상하며 그린 가족도와 함께 걸린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