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렁쩌렁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도, 홀로 빛나는 협연자도 없는 체임버(소규모 기악 합주) 공연. 체임버 공연인만큼 외적으로 화려한 ‘축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느때보다 격정적인 드라마가 무대 위에 펼쳐졌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클래식 레볼루션 2023 - 체임버 뮤직 콘서트 II’ 이야기다.

이날 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과 조진주, 첼리스트 한재민 등 스타 연주자들이 피 튀기는 열정과 내밀한 교감을 선보이며 한 편의 멜로 드라마를 완성했다.

프로그램은 클래식계에서 유명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낸 슈만과 브람스의 실내악 작품으로 구성됐다. 클래식 레볼루션 예술감독이자 이날 공연에 클라리네티스트로 참여한 안드레아스 오텐자머는 연주 직전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를 둘러싼 연애사는 요즘 핫한 K드라마의 서사와 다름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스승과 제자로 만난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는 한순간에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을 하기 위해 예비 장인과 혼인 허가 소송까지 불사했다. 이들 커플을 곁에서 지켜본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슈만의 후배 브람스였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며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청춘 남녀의 삼각관계, 부모님의 결혼 반대, 비현실적인 수준의 순정 등 이들의 이야기는 드라마 단골 소재로 가득하다.
불꽃 같은 사랑을 연주한, 불꽃같은 에너지의 5중주
지난 15일 오후 롯데콘서트홀에서 윤홍천·조진주·한재민이 슈만 피아노 삼중주 제1번을 연주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첫 곡은 윤홍천(피아노) 조진주(바이올린) 한재민(첼로)의 슈만 피아노 삼중주 제1번 d단조. 전체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슈만이 클라라와 한창 뜨겁게 사랑할 때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곡의 초연에서도 클라라 슈만이 피아노를 맡았다.

개성 넘치는 조진주의 연주는 어두우면서도 열정적인 이 곡과 잘 어우러졌다. 바이올린의 존재감이 큰 영향일까. 1악장에서는 나머지 연주자들, 특히 피아노가 다소 묻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2악장부터는 세 연주자의 에너지가 동시에 고조되며 점차 균형을 찾아갔다. 느리고 서정적인 3악장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나지막하게 대화하듯 이중주를 들려줬다. 3악장에서는 특히 한재민의 깊이있는 소리가 두드러졌다. 그는 풍성하고 정갈한 비브라토로 곡의 균형을 맞췄다.

이어 브람스의 왈츠 2곡과 헝가리안 댄스 제7번이 클라리넷 5중주로 연주됐다. 오텐자머는 클라리네티스트로 함께했다. 브람스 왈츠와 헝가리안 댄스 모두 한번쯤 들어본 친숙한 곡이다. 이를 5중주 버전으로 듣는 것은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6명의 연주자가 돌아가며 기량을 뽐낸 덕분에 공연장에는 익살맞은 춤판이 벌어졌다.
불꽃 같은 사랑을 연주한, 불꽃같은 에너지의 5중주
왼쪽부터 레이 첸, 한재민, 조진주, 조정민, 김사라, 오텐자머. 지난 15일 연주자들이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을 연주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최다은 기자

하이라이트는 2부의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였다. 안드레아스 오텐자머·레이 첸·조진주·한재민·김사라(비올라)·조정민(더블베이스) 등 6명의 연주자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과 사운드를 보이며 완벽한 케미를 선보였다. 레이 첸과 조진주, 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서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불꽃같은 에너지를 선보였다.

두 바이올린이 뜨겁게 불을 지르면 비올라가 균형을 잡아주고 첼로, 더블베이스가 명암을 부여했다. 다소 차가운 소리를 내는 현악 파트 사이에서 클라리넷이 맑고 둥근 소리로 이들을 중재했다. 오텐자머는 오작교처럼 중심을 잡으며 마지 지휘하듯 리드해 나갔다.

함께 긴밀하게 호흡을 맞추며 음을 맺고 끊는 부분은 체임버의 주된 묘미였다. 음을 함께 끄는 부분 등에서 이들은 서로 호흡, 눈빛을 통해 절묘하게 드라마를 만들어 갔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