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Where do we go from here?)

올해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의 큰 주제는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의 제목에서 가져 왔다.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은 축제와 시민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다.

2020~2021년 코로나19로 축제를 제대로 열 수 없었던 EIF는 지난해에야 비로소 정상적으로 개최됐지만, 관객들이 아직 극장에 앉아 있기를 두려워한 탓에 축제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올해 축제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제대로 열리는 사실상 첫 축제다.

니컬라 베네데티 EIF 예술감독은 “1947년 EIF가 처음 열릴 때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취지로 시작된 것처럼, 올해도 코로나19 이후 다시 한번 공동체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시작해 오는 27일까지 3주간 열리는 EIF엔 총 295개에 달하는 공연이 펼쳐진다. 클래식 음악부터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별 주요 공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 22개 교향곡의 향연
[여기는 에든버러]3주간 295개 명품 무대…피나 바우쉬에서 사이먼 래틀까지
EIF를 찾는 클래식 공연팀은 총 22개 교향곡 콘서트와 19개 리사이틀을 선보인다. 그중 가장 독특한 공연 가운데 하나는 지난 8일 세계적 거장 지휘자 이반 피셔가 이끄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자크 인사이드 아웃’ 공연. 객석의 의자를 모두 치운 뒤 관객들이 편하게 앉거나 누울 수 있는 빈백으로 채우고, 그 사이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앉아서 연주하는 공연이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관객에게 오케스트라 속으로, 나아가 음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험을 주기 위해 기획된 공연이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일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의 교향곡 ‘투랑갈릴라’를 연주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로 수용소에 갇힌 경험이 있는 메시앙은 당시 전쟁 속에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 연주를 통해 역경 앞에서의 희망을 그린다. 남미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네수엘라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오는 21, 24, 26일 공연한다.

그 밖에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리사이틀도 열린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의 지난 11일 연주회는 미리 공연의 레퍼토리를 공개하지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국내 연주자 중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도 각각 15일과 17일 리사이틀을 열어 현지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피나 바우슈 ‘봄의 제전’·ABT의 시그니처 무대도

축제에 참가한 무용팀 목록도 화려하다. 현대 무용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독일 출신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대표작 ‘봄의 제전’이 17~19일 에든버러 극장에서 공연된다. 이 공연은 1978년 EIF에서 영국 초연된 바 있다. 이번엔 아프리카 14개국 출신의 무용수 34명이 그의 안무를 재현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격렬하고 시적인 투쟁을 벌이며 ‘희망’을 그리는 작품이다.
[여기는 에든버러]3주간 295개 명품 무대…피나 바우쉬에서 사이먼 래틀까지
미국 최고의 무용팀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도 23~25일 에든버러 페스티벌 시어터 무대에 선다. 팀 설립자인 앨빈 에일리가 안무를 만들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작품인 ‘계시(Revelations)’ ‘메모리아(Memoria)’ ‘더 리버(The River)’ 등을 선보인다.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 안무가 샤론 에얄이 가이 베하르와 함께 이끄는 ‘L-E-V 댄스 컴퍼니’는 2018년 EIF에 참가했던 ‘러브(LOVE)’·‘러브 챕터2(Love Chaper2)’의 후속작인 ‘챕터3: 잔혹한 심장의 여행’을 지난 13~14일 선보여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9명의 댄서가 혼돈을 넘어 공동체의 형태로 사랑과 관계를 탐구해 나가는 작품이다.

○한가득 음식 차려진 무대…호평 이어진 우리 창극
[여기는 에든버러]3주간 295개 명품 무대…피나 바우쉬에서 사이먼 래틀까지
독특한 형식과 내용의 공연이 많다. 공연 연출가이자 퍼포머 제프 소벨은 관객 참여형 공연 ‘음식(Food)’을 축제 기간 내내 무대에 올린다. 가장 일상적 행위인 ‘식(食)’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연이다. 소벨이 차려 놓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관객들은 음식의 냄새와 맛, 촉각 등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소벨 특유의 유머 있는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있다.

지난 9~11일 공연한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도 축제의 하이라이트 중 한 꼭지를 장식했다. 그리스 비극을 우리 전통 음악인 판소리로 표현한 독특한 공연이다. 이번 축제에서 이 공연은 영국 가디언 리뷰에서 별 다섯 개를 받기도 했다. 에든버러=신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