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숙청한 가해자가 갑자기 찾아와 용서를 구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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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개봉 러시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1930년대 '피의 대숙청' 배경
집행 담당 경찰이 숙청대상 되자
피해자 유족 찾아 용서 구해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1930년대 '피의 대숙청' 배경
집행 담당 경찰이 숙청대상 되자
피해자 유족 찾아 용서 구해
클래식 애호가라면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회고록 <증언>이나 이를 바탕으로 창작한 소설 등을 통해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피의 대숙청’ 관련 이야기를 접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도중 자리를 뜬다. 뒤이어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이 오페라를 ‘형식주의’로 비판하는 글이 실린다. 쇼스타코비치는 곧 숙청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집에 들이닥친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에 급작스럽게 끌려갈 것이란 공포에 사로잡힌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러시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시공간적 배경은 피의 대숙청이 절정으로 치닫던 1938년, 옛 소련의 제2도시였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다. 무대는 피의 대숙청을 집행하던 엔카베데의 본거지다.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 분)는 엔카베데의 경찰관이다. 러시아 부부 감독인 나타샤 메르쿨로바와 알렉세이 추포프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같이했다.
볼코노고프는 어느 날 동료 한 명이 ‘재평가’ 소환을 앞두고 창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것을 목격한다. 동료 경찰관들이 고문과 즉결 처형을 의미하는 재평가를 받기 위해 잇달아 소환되는 것을 본 볼코노고프는 바로 도망친다.
재평가받은 동료들이 매장된 집단무덤에 간 그는 절친하던 동료 베레테니코프(니키타 쿠쿠슈킨 분)의 환영을 본다. 친구는 볼코노고프에게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도 진심 어린 용서를 해준다면 지옥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볼코노고프는 이후 직속상관 골로비나 소령(티모페이 트리분체프 분)과 옛 동료들의 추격을 피해가며 그가 죽인 피해자들의 유족을 찾아다닌다. 피해자들이 날조된 혐의로 자백을 강요당했음을 유족에게 털어놓고 용서를 청한다.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피의 대숙청을 예습하는 게 좋다. 1933년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소련을 제압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내부의 적’을 먼저 제거하기로 하고, 피의 대숙청을 시작한다. 숙청을 실행한 엔카베데가 지목한 사람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 수용소에 갇히거나 총살당했다.
영화는 1930년대 레닌그라드의 황량한 거리 풍경과 사람들, 위압적인 엔카베데 본거지의 모습 등을 그럴듯하게 재연한다. 엔카베데에서 ‘미샤 삼촌’(이고르 사보치킨 분)이 부하들에게 총알 한 발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실습 장면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도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피의 대숙청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더 빛난다.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올라 수상엔 실패했지만 호평을 받았다. 일부 허점도 보인다. 상사가 총애하고, 동료와 후배들이 존경하던 볼코노고프 대위가 왜 갑자기 ‘재평가’ 대상에 오르는지, 왜 강압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를 감안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다. 피해자 가족 입장에선 위압적인 가해자가 갑자기 나타나 용서를 구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엔카베데에 끌려가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한 어린아이는 볼코노고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용서 안 해줄 거예요.”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스탈린은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도중 자리를 뜬다. 뒤이어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이 오페라를 ‘형식주의’로 비판하는 글이 실린다. 쇼스타코비치는 곧 숙청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집에 들이닥친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에 급작스럽게 끌려갈 것이란 공포에 사로잡힌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러시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시공간적 배경은 피의 대숙청이 절정으로 치닫던 1938년, 옛 소련의 제2도시였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다. 무대는 피의 대숙청을 집행하던 엔카베데의 본거지다.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 분)는 엔카베데의 경찰관이다. 러시아 부부 감독인 나타샤 메르쿨로바와 알렉세이 추포프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같이했다.
볼코노고프는 어느 날 동료 한 명이 ‘재평가’ 소환을 앞두고 창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것을 목격한다. 동료 경찰관들이 고문과 즉결 처형을 의미하는 재평가를 받기 위해 잇달아 소환되는 것을 본 볼코노고프는 바로 도망친다.
재평가받은 동료들이 매장된 집단무덤에 간 그는 절친하던 동료 베레테니코프(니키타 쿠쿠슈킨 분)의 환영을 본다. 친구는 볼코노고프에게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도 진심 어린 용서를 해준다면 지옥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볼코노고프는 이후 직속상관 골로비나 소령(티모페이 트리분체프 분)과 옛 동료들의 추격을 피해가며 그가 죽인 피해자들의 유족을 찾아다닌다. 피해자들이 날조된 혐의로 자백을 강요당했음을 유족에게 털어놓고 용서를 청한다.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피의 대숙청을 예습하는 게 좋다. 1933년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소련을 제압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내부의 적’을 먼저 제거하기로 하고, 피의 대숙청을 시작한다. 숙청을 실행한 엔카베데가 지목한 사람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 수용소에 갇히거나 총살당했다.
영화는 1930년대 레닌그라드의 황량한 거리 풍경과 사람들, 위압적인 엔카베데 본거지의 모습 등을 그럴듯하게 재연한다. 엔카베데에서 ‘미샤 삼촌’(이고르 사보치킨 분)이 부하들에게 총알 한 발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실습 장면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도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피의 대숙청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더 빛난다.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올라 수상엔 실패했지만 호평을 받았다. 일부 허점도 보인다. 상사가 총애하고, 동료와 후배들이 존경하던 볼코노고프 대위가 왜 갑자기 ‘재평가’ 대상에 오르는지, 왜 강압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를 감안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다. 피해자 가족 입장에선 위압적인 가해자가 갑자기 나타나 용서를 구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엔카베데에 끌려가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한 어린아이는 볼코노고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용서 안 해줄 거예요.”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