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비치의 1140억짜리 사각형…러시아 최고가 그림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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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찬희의 너무 몰랐던 요즘 미술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돼 8580만 달러(약 1140억)에 낙찰된 작품이 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의 <절대주의 구성>으로 지금까지도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 중 최고가로 기록되고 있다. 각기 다른 크기와 색깔의 사각형들이 조합된 이 회화는 말레비치가 1913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미니멀한 양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말레비치가 그린 사각형이 후대에 이토록 높이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러시아의 예술은 여전히 아카데미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었다. 아카데미는 18세기 중반 창설된 이후 약 200년간 그리스 신화와 성경적 주제를 바탕으로 고전 회화, 조각, 건축, 판화를 가르쳤다. 역사화를 가장 높은 등급으로 매겨 장르를 기준 삼아 회화 작품들을 심사했고, 이는 곧 작가의 부와 명예로 이어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주요 미술사조로 절대주의를 꼽지만, 실제로 당시 러시아에서는 고전 양식을 기초 삼아 그려낸 작품들이 예술계의 주류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전통적인 규범과 기준에서 평가받기를 거부한 실험적인 예술을 표방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15년 아카데미가 위치해 있던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전<0.10>’이 개최된다.
숫자 ‘0’은 형태의 ‘제로’ 즉 기원을 뜻하고, ‘10’은 이 전시에 참가한 열 명의 작가를 의미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반 푸니(Ivan Puni 또는 Jean Pougny)와 구축주의를 대표하는 타틀린(Vladimir Tatlin) 등이 참여했으며, 말레비치는 이 전시에서 ‘대상이 없는’ 작품 35점을 공개했다. 전시가 끝날 무렵 말레비치는 전시 카탈로그를 출판했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로부터 절대주의로>라는 제목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이전의 예술들과 근본적인 측면에서 결별을 이루었는지, 재현할 대상이 없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말레비치는 예술이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상주의, 야수주의, 그리고 입체주의까지도 대상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재현할 대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회화는 회화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주의 이전의 모든 회화, 조각, 문학, 음악은 자연의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다. ‘대상을 재현한다’는 짐을 지고 있는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캔버스 위에는 사각형만 남게 되었다. 말레비치의 정사각형은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네 변이 같고, 네 각이 같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형태로서 그의 유일한 조형 언어가 된다.
정사각형이 반으로 쪼개져 수직으로 교차하면 십자 형태가 되고, 수없이 각도를 변형해가며 겹쳐진 정사각형들은 원을 이룬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형태를 관람객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순수하게 회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그의 정사각형이 그 어느 시대의 작가와 작품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신화와 성경을 모티브로 그려야만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받았던 과거에 대해서는 ‘신들은 죽었으며, 다시는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회화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과거와 단절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 이전의 것들과 구분되고자 부단히 연구했던 화풍들도 말레비치에게는 회화를 온전히 감상하는 데에는 방해요소에 불과했다.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부터 순수한 감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회화는 결국 순수한 기하학의 특징만을 띠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를 보면 공간감, 역동성, 대비감 등 회화의 본질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말레비치는 색 자체가 특정 감정을 떠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든 색을 배제시키기에 이른다. <흰 바탕 위에 흰 정사각형>에서는 캔버스 내 공간을 부유하는 정사각형을 그려 넣어 캔버스를 공간의 개념으로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바탕과의 경계가 희미해져 배경과 하나를 이루기 시작한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만 회화의 정신성을 드러내며 물질적인 세계와 시각적 경계를 넘어선다.
숫자 ‘0’은 형태의 ‘제로’ 즉 기원을 뜻하고, ‘10’은 이 전시에 참가한 열 명의 작가를 의미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반 푸니(Ivan Puni 또는 Jean Pougny)와 구축주의를 대표하는 타틀린(Vladimir Tatlin) 등이 참여했으며, 말레비치는 이 전시에서 ‘대상이 없는’ 작품 35점을 공개했다. 전시가 끝날 무렵 말레비치는 전시 카탈로그를 출판했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로부터 절대주의로>라는 제목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이전의 예술들과 근본적인 측면에서 결별을 이루었는지, 재현할 대상이 없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말레비치는 예술이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상주의, 야수주의, 그리고 입체주의까지도 대상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재현할 대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회화는 회화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주의 이전의 모든 회화, 조각, 문학, 음악은 자연의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다. ‘대상을 재현한다’는 짐을 지고 있는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캔버스 위에는 사각형만 남게 되었다. 말레비치의 정사각형은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네 변이 같고, 네 각이 같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형태로서 그의 유일한 조형 언어가 된다.
정사각형이 반으로 쪼개져 수직으로 교차하면 십자 형태가 되고, 수없이 각도를 변형해가며 겹쳐진 정사각형들은 원을 이룬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형태를 관람객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순수하게 회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그의 정사각형이 그 어느 시대의 작가와 작품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신화와 성경을 모티브로 그려야만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받았던 과거에 대해서는 ‘신들은 죽었으며, 다시는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회화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과거와 단절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 이전의 것들과 구분되고자 부단히 연구했던 화풍들도 말레비치에게는 회화를 온전히 감상하는 데에는 방해요소에 불과했다.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부터 순수한 감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회화는 결국 순수한 기하학의 특징만을 띠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를 보면 공간감, 역동성, 대비감 등 회화의 본질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말레비치는 색 자체가 특정 감정을 떠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든 색을 배제시키기에 이른다. <흰 바탕 위에 흰 정사각형>에서는 캔버스 내 공간을 부유하는 정사각형을 그려 넣어 캔버스를 공간의 개념으로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바탕과의 경계가 희미해져 배경과 하나를 이루기 시작한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만 회화의 정신성을 드러내며 물질적인 세계와 시각적 경계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