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을 사야 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노 아트, 노 머니!"
평생 그림을 모으는 아버지의 딸로 자랐다. 집판 돈으로 그림을 사는 지독한 예술 애호가셨다. 나는 구석기 시대 빗살 무늬 토기를 흡사 원시인이 된 듯 만져봤다. 겸제 정선의 진경 산수화도 우리집 뒷산인 양 매일 봤다. 청전 이상범 춘하추동 병풍을 배경으로 사계절 내내 소꿉놀이를 했다. 온 집안에 골동품, 예술 작품이 널려있었다. 아버지의 그림 사랑은 끝이 없었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자꾸 말하고 싶어진다. 독실한 신앙을 전도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버지는 딸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그림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어린 딸을 집중시켜야 하니 최대한 재밌고 과장되게 예술썰을 풀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예술썰은 아버지의 유산인건가.
어떤 그림을 사야 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노 아트, 노 머니!"
그렇게 평생을 모았으니 딸인 내가 갤러리를 하게 된 건 운명인지 몰랐다. 그림 속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예술과 비지니스는 상극이면서 상생해야 하는, 세상 아이러니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처음엔 꿈에도 몰랐다. 그저 방구석에 쌓여있던 그림들이 단장을 하고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드러낸 자태가 너무 고와서, 하루 종일 그들만 보고 있어도 미소가 떠나지 않는 아버지와 마냥 행복하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곧 깨달았다. 돈으로 예술을 사긴 쉬웠는데, 예술이 돈이 되는 길은 너무 멀고도 험하다는 걸. 좋아서, 너무 사랑해서 데리고 온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갤러리에 그득했는데, 그들을 사랑해 줄 사람이 귀해도 너무 귀했다. 아니, 거의 없었다. 물론 나는 큰 실망과 좌절에 눈 밑에 빗살 무늬가 그어졌지만, 아버지의 예술 애호는 식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팔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공들여 살피고 어루만지고 깊은 사랑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어떤 그림을 사야 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노 아트, 노 머니!"
올해 봄에 '노머니 노아트(No Money, No Art)'라는 프로그램을 공중파에서 했었다. '예술이 돈이 되는 걸 보여 주겠다'는 파격적인 컨셉으로 KBS 2TV에서 10부작으로 방송했는데 퍽 흥미진진했다. 예술과 돈, 여전히 아이러니하고 불편한 진실을 좀 더 가볍고 경쾌하게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여태 우리는 예술 앞에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을 품위 없음으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예술과 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다. 서로 돕고 친하게 지내야 하는 상호 보완의 관계다. 물론 예술은 그들만의 리그 같다며, 더군다나 흥미 위주로 예능화한 것에 불편함을 말하는 이도 있다.

예술가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작업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라이브 드로잉 쇼'는 가히 충격적이긴 했다. 좀 더 자극적인 퍼포먼스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 회차별 우승한 작가의 작품을 현장에서 즉각 경매에 붙이는 과정도 박진감 넘쳤지만 즉물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예술이 돈이 되는 순간을 지켜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방송을 지켜보며 여러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정이 순기능으로 작용하기를 바랐다. 예술가들의 극적 몰입, 영감이 폭발하는 순간, 결정체로서의 예술이 온전히 인정되고 수용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재미 속에서 의미가 찾아지길 바라마지 않았다.

방송이 종영되고 그 때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는, 노머니 노아트 남겨진 이야기 <서른두개의 에필로그> 전시가 시작됐다. 방송에 출연했던 서른 두명의 예술가들, 그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강렬하고 고유한 각각의 세계가 펼쳐진 느낌이 완연했는데, 그런데도 그들의 조화로움이 먼저 느껴졌다. 어느 한 작품 치우침이 없는, 마치 어깨동무하고 활짝 웃는 이들처럼.
어떤 그림을 사야 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노 아트, 노 머니!"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곽재선 문화재단 '갤러리선'에서 채정완 작가를 만났다. 그는 민머리 검은 양복 사내들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자기만의 개성이 뚜렷한 작가다. 방송에 출연한 소감을 먼저 물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우리끼리는 누가 1등하고 그런 건 상관 없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예술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났던 것 같아요.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아! 마음 한켠이 찡했다. 사람들의 더 많은 관심과 재미를 유도하고자 경쟁과 순위 구도를 택한 방송이었지만, 정작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하냥 선하고 순했던 것이다. 20분간 펼쳐 보인 드로잉 퍼포먼스도 이기고 싶다는 욕망보다 스스로의 열정을 증명해 보이는 시간이었겠구나 불현듯 감동이 밀려왔다. 전시된 작품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현장에서 그렸던 작품들에는 당시의 떨림, 열망, 좌절, 환희까지 고스란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날 것의 영감이 춤추듯 거기 있었다. 우리는 예술에 지불할 때 바로 저 귀한 열정과 뜨거운 에너지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지친 삶을 고양시키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그림을 사야 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노 아트, 노 머니!"
어떤 그림을 사야 하나요? 많은 분들이 묻는다. 투자를 목표로 하시면 사지 말라고 말한다. 하긴 예술은 좀 특별한 분야여서 묻지마 투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조금이라도 예술을 애호하는 마음을 지닌 특별한 분들이 소장한다고 생각한다. 좌심방 우심실 정성을 다하여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예술에 계속 돈을 쓴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도 유언으로 그림들을 부탁하셨다. 평생 좋아하는 예술과 함께 하다 가셨으니 행복한 삶이셨다.

예술은 소유보다 향유가 먼저다. 예술을 사랑하면 알게 된다. 그림 한 점에서 만나는 나의 마음을, 당신의 취향을. 그렇게 예술로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따뜻하고 충만한 것인지도. 먹지도, 들고 다니지도 못하는 내 좋은 그림 한 점이 주는 생의 특별함을.

돈을 주고 사지만 자본 가치를 뛰어 넘는 삶의 심미안을 예술이 만들어준다. 노머니 노아트는 궁극적으론 노러브 노아트, 사랑 없인 예술도 없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향유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