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겸 아티스트 김창완이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솔 기자
가수 겸 아티스트 김창완이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솔 기자
“아니 벌써/해가 솟았나/창문 밖이/훤하게 밝았네….”

1977년 12월, 전에 없던 음악이 서울 길거리에 울려퍼졌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은 명반인 산울림의 1집, ‘아니 벌써’였다. 참신한 수록곡만큼이나 커버도 범상치 않았다. 레코드판 커버에 가수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박아 넣는 게 상식으로 통하던 시대. 산울림은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그린 그림을 표지에 넣었다. 담백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동심과 장난끼가 묻어 있는 산울림 음악 특유의 매력. 이를 그대로 담아낸 김창완(69)의 작품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린다"...붓을 든 '록의 전설' 김창완 [인터뷰 전문]
이런 ‘작품 이력’을 감안하면 지난해 그의 ‘화가 데뷔’는 다소 늦은 셈이다. 자신의 그림을 처음으로 대중에 선보인지 45년, 김창완이라는 이름 뒤에 ‘한국 록의 전설’이라는 호칭을 비롯해 배우, 라디오 DJ, 시인, 소설가 등의 직업이 줄줄이 붙고 난 뒤에야 화가라는 두 글자가 들어왔으니 말이다. 지난해 초 단체전 참가를 시작으로 꾸준히 전시를 이어오던 그는 오는 9월 금산갤러리를 통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작품을 출품하며 한국 미술의 ‘메인 무대’에 첫선을 보인다. ‘신인 화가’를 자처하는 김창완을 그의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만났다.

아르떼 웹사이트에만 공개되는 이 기사에서는 분량 제약 없이 그의 말투를 최대한 살려 답변 그대로를 실었다. 이를 정리한 기사는 8월 24일 아르떼 웹사이트와 포털 및 25일자 한국경제신문 wave섹션에 게재될 예정이다.

▶46년 전 앨범 커버를 화가 데뷔작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그건 데뷔작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기라성같은 선배 화가들이 많은데 말조심해야지. 음악이야 한지 오래됐지만, 화가로는 신인으로 데뷔하는 입장이랄까요. 커버는 그냥 그린거에요. 1집 앨범이 나왔는데, 얼굴을 LP판에 박기가 너무 창피한 거야. 그래서 대신 그림을 그리기로 했어요. 애들이 그린 그림이면 좋겠다 싶어서, 동네 애들을 불러모아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지요. 여섯 명이 모였는데, 완성된 그림을 보니 전부 빨간 크레파스로 지렁이만 그려놨더라고요.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제가 왼손으로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그렸어요.”

▶원래 오른손잡이 아닌가요.
“맞아요, 오른손잡이죠. 왼손은 아마 그때 처음 써봤을 거에요. 안 예뻐도 그냥 떠오르는대로 쭉쭉 그려서 보냈더니 통과가 됐어요. 2집 앨범을 만들 때도 여전히 얼굴 내밀기가 싫으니 제가 그림을 그렸죠. 이번엔 오른손으로 그렸는데, 역시 재미가 없더군요. 아무튼 그래서 계속 그림을 그려서 커버에 넣게 된 거예요. 진지하게 그린 게 아니니 화가로서 그림을 그렸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어쩌다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게 됐나요.
“10여년 전부터 그림을 사 모았어요. 작품을 바라보다 보니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붓을 사고, 물감을 사고, 나이프라는 걸 처음 사서 써보기도 하고. 지금 보면 가관도 아닌데요, 그래도 그렸어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의 명언 중에 이런 게 있거든요. ‘음악,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그림도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수 겸 아티스트 김창완이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솔 기자
가수 겸 아티스트 김창완이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솔 기자
▶왜 그림을 그립니까.
“글쎄, 그걸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생각은 합니다. 음악이 왜 그렇게 애틋하고 아름다운가. 자기라는 완고하고 절대적인, 유아독존적인 속박을 벗어날 수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귀한 목숨을 받아서 세상에 나왔는데, 내가 알고 경험한 그 알량한 자기 안에서 살다 죽는게 참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내가 아는게 있으면 얼마나 알겠느냐고요. 그런데 음악을 하면 그 틀을 깨고 어마어마한 세상과 만날 수 있는거죠. 저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해요. 내가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이 나에게 뭔가를 하게 하는 것이라고요.”

▶더 큰 세계를 만나기 위해 그린다는 말이지요.
“네. 다만 그림을 그릴 때는 손에도 자신이 없고, 보는 것에도 자신이 없다 보니 ‘내가 도대체 왜 그림을 그리지, 왜 이런 걸 그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나라는 틀을 벗어나서 더 큰 세계를 만나고 싶은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림을 제대로 그리고 있는지 확신이 없는 거죠. 한편으로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든지, 깊은 속에는 그림으로 유명해지고 싶다든지, 아니면 심지어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든지, 이런 욕망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것에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고요.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싶은건지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요. 참 알고는 싶은데, 대답은 못 얻을지도 몰라요. 이런 생각은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이렇게 존재한다고.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이, 어떻게 할 힘도 없이 예술을 하게 된다고. 어떻게 보면 내가 대기조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술이 나를 하게 하도록 기다리는 5분 대기조. 만일 세상의 절대적인 진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거나 ‘예술이 나를 한다’는 의미도 퇴색되겠지요. 그래도 나는 아마 그림을 그리고 노래할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록의 전설이지만 화가로는 신인입니다. 음악보다 그림이 상대적으로 서툴 수밖에 없는데요. 그림을 그릴 때 어려운 점이 뭔가요.
“당연히 노래보다 그림이 어렵지요. 캔버스를 앞에 두면 힘들고 막막해요. 그런데 그 막막함이 결코 나쁜 게 아니에요. 제가 늘 아침마다 체조를 하는데요, 오늘 아침만 해도 스트레칭을 하다가 ‘어떤 운동은 일, 이, 삼, 사로 숫자를 세는 게 편한데 어떤 건 하나, 둘, 셋, 넷 하는 게 편하다. 왜 그렇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사전에서 기수와 서수를 찾아봤어요. 낱말 공부를 오늘 아침에도 했다고요. 일, 이, 삼, 사를 못 세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이걸 겨우겨우 오늘 안 거예요. 세상은 원래 어마어마한 것이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게 당연하지요.

그래서 다시 되풀이하는 얘기지만, 그림을 그리는 건 ‘캔버스 안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한가’를 확인하는 과정이에요. 순수하게 세상과 만나기 위해. 그걸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욕망과 욕심으로 캔버스를 대해요.”

▶순수함을 계속 강조하는데, 동심을 추구하는 건가요.
“동심과도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물론 아이들은 정말 놀라운 존재에요. 마침 오늘 아침 제가 진행하는 라디오 사연 중에 이런 게 있었는데요. 엄마가 밖에 나가면서 애한테 ‘숙제랑 이런저런 할 일 다 해놓으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거에요. ‘엄마가 나를 100% 믿으면 100% 할 거고, 60% 믿으면 60% 할 거에요.’ 기가 막힌 말이에요. 그림도 마찬가지에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 내가 100% 솔직하면 100% 솔직한 작품이 담길 것이고, 30%면 30%밖에 안 담기는 거지요.

제가 미술사나 이런 것을 잘 모르지만, 음악으로 데뷔하기도 전부터 화가 파울 클레를 좋아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끌리더라고요. 요즘 그림을 그리다 보니 계속 파울 클레 그림이 생각이 나요. 단순하고 자유분방한, 세상에서 보지 못한 그 형태. 그 작품들의 본질 속에 그림과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 담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인터뷰를 하던 중, 김창완의 등 뒤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린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초 전시에 걸었던 작품. 제목은 ‘코 없는 엄마: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엄마 얼굴’이다.
'코 없는 엄마: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엄마 얼굴'.
'코 없는 엄마: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엄마 얼굴'.
▶본인의 작품 중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중 하나인 건 맞아요. 어떻게 저 작품을 그리게 됐냐면요. 아이한테 처음으로 붓을 쥐어준 뒤에 ‘너 마음대로 그려봐’ 하면 애들이 뭘 하겠어요. 그냥 훅 붓을 긋겠지요. 저도 그랬어요. 100호짜리 캔버스가 있는데, 거기다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에요.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일단 막 동그라미를 크게 쳤더니 그 모양이 엄마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든 거에요. 그래서 눈썹이랑 눈을 그리고 엄마가 웃는 걸 딱 그렸잖아요. 그런데 너무 좋은 거예요. 이뻐요. 그래서 집에다가 걸어놨어요.”

▶지난해 첫 데뷔 전시에도 나갔던 작품인데, 판매를 하지 않았군요.
“당시에는 작품을 아예 팔 생각이 없었어요. 지난해 전시는 저랑 친한 황주리 작가가 ‘우리 단체전을 하는데 같이 작품을 내 보라’고 해서 하게 된 거였는데요. 화랑이 뭘 하는지, 전시를 어떻게 하는지 전혀 감이 없었어요. 내 작품을 떠나보내기가 너무 싫어서 대놓고 화랑에 ‘그림 팔지 말아달라’고 했지요.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를 했는데 전시하기도 전에 다 사간 일도 있어요. 그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뭐냐’고 화를 냈지요. 그림이 팔리면 이별하는 거 같아서, 그림에 예의를 갖춰야겠다고 생각해 정장을 입은 적도 있고요.
'불의 기억' 연작.
'불의 기억' 연작. "아련한 아궁이의 불빛을 기억해냈습니다."
그 다음에 전시를 하면서 작품이 팔리는 데 좀 익숙해졌어요. 신인이니까 여기저기 연락 오면 감사합니다 하고 전시하고, 작품 내라면 그냥 내고 했지요. 지금은 화랑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좀 알게 돼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이제 ‘그래 이제 갈 길 가라’는 마음이에요. 하하.”

▶화가라면 누구나 자기 그림에 애착이 있겠지만, 특별히 애틋한 마음인 듯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해요. 여러가지 일을 하다 보니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메모하고요. 아침 방송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그림을 그려요. 계속 스케치를 하는 거죠. 방송국에서 뭐라 하는거 아니야? 나 잘리면 어떡해.(웃음)”

그는 자신의 그림 연습 노트를 보여줬다. 자신의 안경, 책상 위 연필깎이를 비롯해 평범한 사물들을 수없이 많이 그려본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김창완이 작품을 연습한 흔적.
김창완이 작품을 연습한 흔적.
“모델을 서 주는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주변의 물건들을 그리는 거지요. 그런데 쉽지 않아요. 연필깎이만 해도 왼쪽 눈으로 볼 때, 오른쪽 눈으로 볼 때가 다 달라요. 그리다 보면 난 바본가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그래도 엄청나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알아주세요.”
완성된 작품 '노란 귀걸이'. 김창완은 이렇게 설명했다.
완성된 작품 '노란 귀걸이'. 김창완은 이렇게 설명했다. "왠지 귀걸이가 슬퍼 보이는 여인을 그렸습니다. 귀걸이와 같은 장신구들은 혹시 불안한 마음이 뭉쳐있는 것들일지도…"
▶가수, 배우, 방송에 더해 그림까지 열심히 그리려면 정말 24시간이 모자랄 것 같습니다.
“그림 그릴 자유를 얻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살고 있어요. 그래도 욕심이 나요. 음악보다 그림이 좋다는 건 아닌데요. 음악은 내가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저절로 하게 된 느낌이라면, 그림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또 좋은 것은, 미술을 하니까 음악도 더 잘 들리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에 연기를 시작할 때 팬들이 ‘음악만 해도 모자란데 무슨 연기까지 하느냐’고 화를 냈는데요. 그림을 그리는 게 음악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

▶앞으로 ‘화가 김창완’으로 자주 대중 앞에 등장할 예정입니다. 오는 9월 KIAF도 그렇고요. 관객들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면요.
“연극 같은 걸 하다 보면 ‘웃음 포인트’라는 게 있는데요. ‘여기쯤에서 관객들이 웃겠지’ 하는 부분이에요. 그런데 관객들이 웃는 건 그 대목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에요. 시나리오 작가나 배우들이 아니라 관객이 만드는, 하다 보면 생기는 건데요. 그림도 보는 사람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 관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 좋겠다는 건 없고요.
'기다림에 지친 노란 눈물'.
'기다림에 지친 노란 눈물'.
저 말고 다른 작가, 특히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볼 때는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작품 중학교 때 그림을 그려서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비원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나가서 신나게 놀다가 시간에 쫓기게 됐어요. 그래서 점심에 먹은 도시락을 열고 밥풀을 모아서 도화지에 바른 다음에, 낙엽을 뿌리고 밟아서 냈어요. 대단한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은 절대 아니었어요. 재능이나 이런 건 언감생심 상상도 못할 일이고요. 그런데 장려상을 받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왜 내가 상을 받았지’ 의아한 생각만 들었는데, 한참 음악 생활도 하고 지금 와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느껴지는 게 있어요. 뭐냐면 대중이라는 것의 중요성. 내가 아무리 기발한 발상, 굉장한 발상을 하더라도 대중은 이걸 다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이라는 세계에서는 어떤 망발조차도 다 이해되고 포용될 수 있다는 것. 이걸 지금 와서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중학생 때 작품을 심사한 선생님들이 그 사실을 보여준 거에요. 그때 그런 경험들이 지금 탈출구가 돼주고 있어요.

그래서 젊은 작가들에게 관객들이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막 태어나려는 병아리를 도와서 계란 껍질을 깨주듯이요. 어릴 때 좌절도 필요하지만 희망을 볼 수도 있잖아요. 또 나처럼 이렇게 늦게 깨지는 달걀이 있을 수가 있잖아요.”

오후 1시쯤 점심식사를 겸해 시작된 인터뷰는 저녁시간을 넘어 자정까지 이어졌다. 인터뷰를 마치자 머릿속에서 노래가 울려퍼지는 듯 했다.

“아니 벌써/밤이 깊었나/정말 시간/가는 줄 몰랐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