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을 사랑한 사진사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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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10,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
10,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곧 내 평생의 테마다.'라고 결정해버렸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중림동의 골목 안 풍경을 찍은 김기찬 사진작가의 말이다. 그의 사진집, <골목 안 풍경>은 6집까지 발간됐다. 사진집에는 중림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풍속화가 김홍도가 이 시대에 사진사로 태어난다면 김기찬의 작품과 같은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나 피사체가 되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얻기까지 수년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는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들을 찍기 위해 그들과 같아져야 했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말을 걸고 웃으며 점차 그들과 동화돼 갔다. 만 2년이 되어서야 덩치 큰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골목을 걸으면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뭐 찍을 게 있냐?’며 먹던 부침개를 나눠주었고, 김치 부스러기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아저씨들도 잔을 내주었다. 더 이상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것은 삶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를 붙잡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장장 33년의 세월이었다.
왜 하필 중림동이었을까? 그는 왜 중림동을 사랑한 것일까? 그가 사는 곳이 중림동이라면 퇴근길에 카메라를 들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의 집은 사직동이다. 사직동은 그가 중림동을 찍기 전,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다. 김현옥 서울 시장이 미친 듯이 추진한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서울의 첫 지하 터널인 사직터널이 착공되면서 사직동의 골목은 사라졌다. 개발은 곧 골목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골목길이 없어지자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유년의 실종이다. 삶은 편해졌는데 뭔가 허전했다. 공동체의 해체였다. 밥 먹고 나면 골목에 나와 바람도 쐬고, 수다도 떨어야 하는데 골목이 없어지니 만남이 줄었다. 아이들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딱지치기, 고무줄놀이를 할 공간이 사라졌다. 서울은 이미 삭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많던 골목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중림동에서 발견한 것은 골목이었다. 중림동은 골목이 남아있어 공동체가 유지됐다. 사진 작업의 테마를 중림동에서 발견한 것이다. “골목 안은 가난해 보였지만 사람 사는 냄새와 온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고향을 잊었던 나에겐 마음속에 그리던 어릴 적 아름다운 고향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골목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서소문에 있던 동양방송 카메라맨이었던 그는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서울역을 찍었다. 청소하는 사람들, 물건을 나르는 지게꾼, 서울역에서 염천교까지 이어지는 행상들을 찍다가 서울역에서 가까운, 그들이 사는 동네까지 따라온 것이다. 중림동은 사대문과 가깝지만, 서울역 서쪽에 위치한 동네이다. 서울로 7017에 올라서면 철길의 동쪽은 고층빌딩이 많은 반면 서쪽은 변변한 빌딩 하나 없는 낙후된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쪽에서 치러진 치열한 전투로 인해 많은 건물과 집이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서울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중림동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폭격으로 담벼락만 남은 곳에 시멘트를 바르고 유리로 창을 냈다. 기와가 없어 함석을 덧대 지붕을 이었다. 집과 집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비좁은 집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집과 집 사이의 공간, 골목에서 하는 것이다. 집안은 답답하고 더운데 골목은 시원하다. 거기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숙제하는 아이들, 동네 여인네들은 모여서 국수를 말아먹었다. 때로는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싸우기도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울렸다. 가난하지만 삭막하지 않은 공간, 골목은 온기 넘치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이며 형제였다. 공동체의 발견이었다. 김기찬이 발견한 ‘골목 안’은 어떤 세상보다도 넓고 깊은 세계였다. 김기찬의 사진집을 들고 중림동을 걸었다. 사진 속 장소가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중림종합사회복지관에 호박마을 쉼터가 보인다. 복지관의 경비실을 마을 쉼터로 제공한 것이다. 이 마을의 애칭이 호박마을이다. 그 시절, 반찬거리가 없어 누구나 할 것 없이 호박을 심었다. 호박잎에 된장을 듬뿍 넣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먹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집과 비슷한 집들은 모두 붉은 글씨로 ‘철거’라고 적혀 있다. 수년 전부터 추진한 재개발 사업이 지지부진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진 속에 등장하는 집과 똑같은 집은 없다. 김기찬은 중림동 어디를 찍은 것인가? 그가 찍은 골목길은 이미 철거돼 아파트로 변한 것이다. 중림로 아래, 삼성 사이버 빌리지로 변한 동네이다. 거대한 아파트 타운으로 바뀌었다. 아파트의 입주와 그가 마지막 작업을 한 시기가 겹친다. 사진 속 주 무대는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의 중림동 모습이었다. 거기까지였다. 중림동 골목이 사라지자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 시절에 살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입주했을 텐데 그가 찾는 사람들은 이제 없었다. 그는 아마도 골목을 찍을 때처럼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을 찍고 싶었는지 모른다. 골목 안 사람들은 대문의 빗장을 열어주었지만, 아파트는 비밀번호를 모르면 자기 집도 들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골목이 상징하는 것은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제 와서 김기찬의 사진이 주목받는 것은 중림동에 골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온기가 묻어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 사진 속 사람들도 아파트에 입주했을까 궁금해진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중림동의 골목 안 풍경을 찍은 김기찬 사진작가의 말이다. 그의 사진집, <골목 안 풍경>은 6집까지 발간됐다. 사진집에는 중림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풍속화가 김홍도가 이 시대에 사진사로 태어난다면 김기찬의 작품과 같은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나 피사체가 되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얻기까지 수년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는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들을 찍기 위해 그들과 같아져야 했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말을 걸고 웃으며 점차 그들과 동화돼 갔다. 만 2년이 되어서야 덩치 큰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골목을 걸으면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뭐 찍을 게 있냐?’며 먹던 부침개를 나눠주었고, 김치 부스러기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아저씨들도 잔을 내주었다. 더 이상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것은 삶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를 붙잡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장장 33년의 세월이었다.
왜 하필 중림동이었을까? 그는 왜 중림동을 사랑한 것일까? 그가 사는 곳이 중림동이라면 퇴근길에 카메라를 들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의 집은 사직동이다. 사직동은 그가 중림동을 찍기 전,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다. 김현옥 서울 시장이 미친 듯이 추진한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서울의 첫 지하 터널인 사직터널이 착공되면서 사직동의 골목은 사라졌다. 개발은 곧 골목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골목길이 없어지자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유년의 실종이다. 삶은 편해졌는데 뭔가 허전했다. 공동체의 해체였다. 밥 먹고 나면 골목에 나와 바람도 쐬고, 수다도 떨어야 하는데 골목이 없어지니 만남이 줄었다. 아이들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딱지치기, 고무줄놀이를 할 공간이 사라졌다. 서울은 이미 삭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많던 골목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중림동에서 발견한 것은 골목이었다. 중림동은 골목이 남아있어 공동체가 유지됐다. 사진 작업의 테마를 중림동에서 발견한 것이다. “골목 안은 가난해 보였지만 사람 사는 냄새와 온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고향을 잊었던 나에겐 마음속에 그리던 어릴 적 아름다운 고향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골목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서소문에 있던 동양방송 카메라맨이었던 그는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서울역을 찍었다. 청소하는 사람들, 물건을 나르는 지게꾼, 서울역에서 염천교까지 이어지는 행상들을 찍다가 서울역에서 가까운, 그들이 사는 동네까지 따라온 것이다. 중림동은 사대문과 가깝지만, 서울역 서쪽에 위치한 동네이다. 서울로 7017에 올라서면 철길의 동쪽은 고층빌딩이 많은 반면 서쪽은 변변한 빌딩 하나 없는 낙후된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쪽에서 치러진 치열한 전투로 인해 많은 건물과 집이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서울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중림동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폭격으로 담벼락만 남은 곳에 시멘트를 바르고 유리로 창을 냈다. 기와가 없어 함석을 덧대 지붕을 이었다. 집과 집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비좁은 집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집과 집 사이의 공간, 골목에서 하는 것이다. 집안은 답답하고 더운데 골목은 시원하다. 거기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숙제하는 아이들, 동네 여인네들은 모여서 국수를 말아먹었다. 때로는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싸우기도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울렸다. 가난하지만 삭막하지 않은 공간, 골목은 온기 넘치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이며 형제였다. 공동체의 발견이었다. 김기찬이 발견한 ‘골목 안’은 어떤 세상보다도 넓고 깊은 세계였다. 김기찬의 사진집을 들고 중림동을 걸었다. 사진 속 장소가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중림종합사회복지관에 호박마을 쉼터가 보인다. 복지관의 경비실을 마을 쉼터로 제공한 것이다. 이 마을의 애칭이 호박마을이다. 그 시절, 반찬거리가 없어 누구나 할 것 없이 호박을 심었다. 호박잎에 된장을 듬뿍 넣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먹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집과 비슷한 집들은 모두 붉은 글씨로 ‘철거’라고 적혀 있다. 수년 전부터 추진한 재개발 사업이 지지부진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진 속에 등장하는 집과 똑같은 집은 없다. 김기찬은 중림동 어디를 찍은 것인가? 그가 찍은 골목길은 이미 철거돼 아파트로 변한 것이다. 중림로 아래, 삼성 사이버 빌리지로 변한 동네이다. 거대한 아파트 타운으로 바뀌었다. 아파트의 입주와 그가 마지막 작업을 한 시기가 겹친다. 사진 속 주 무대는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의 중림동 모습이었다. 거기까지였다. 중림동 골목이 사라지자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 시절에 살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입주했을 텐데 그가 찾는 사람들은 이제 없었다. 그는 아마도 골목을 찍을 때처럼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을 찍고 싶었는지 모른다. 골목 안 사람들은 대문의 빗장을 열어주었지만, 아파트는 비밀번호를 모르면 자기 집도 들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골목이 상징하는 것은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제 와서 김기찬의 사진이 주목받는 것은 중림동에 골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온기가 묻어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 사진 속 사람들도 아파트에 입주했을까 궁금해진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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