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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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성인의 역사를 담은 빽빽한 기록을 표현하는 이 말은 공연예술계에도 역시 있다. ‘공연자료 통합본’이라고도 불리며 한 공연의 준비에서부터 그 공연이 끝나는 시점까지 공연에 관한 세세한 모든 기록을 담고, 그 내용 역시 다양하며 광범위하다. 이 공연 ‘바이블’의 효력이 가장 빛나는 곳은 아마 같은 내용의 공연이 다시 이루어지는 바로 그 시점. 이십 년 만에 다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 한들, 그 바이블이 주는 자신감과 안도감은 결코 작지 않다.

2006년 4월 8일. 첫 한국 공연을 가진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에 관해 정리해 두었던 기록은 지금도 종종 읽곤 한다. 예브게니 키신의 공연을 ‘오페라의 유령’ 혹은 ‘뮤지컬 영웅’처럼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피아노 독주회’가 하나의 공연이며 장르라고 생각해 본다면 키신 이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의 독주회를 무리 없이 치러내는 데 있어 이 기록은 필자에게는 바이블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 당시 공연을 겪으며 기록한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본다.

참 길었던 연주회.

단 하루의 음악회이지만, 이 리사이틀이 준비되기까지의 그 천천한 과정들은 3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음악회를 준비한 두 기획사를 통해 가장 먼저 전해 들은 소식은 예술의전당이 지닌 모든 스타인웨이 모델 D-274(전체길이:cm) 피아노의 일련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640, 660, 699, 309, 318, 610, 656의 역사를 담은 자료가 기획사를 통해 키신 측에 전달되었고,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 직접 선택한 피아노는 640, 699, 309 였다.

키신이 자료에 포함해 달라고 부연했던 것은 예술의전당에서 이 피아노들을 가지고 연주했던 연주자들의 이름이었다. 아크릴이 아닌 상아의 건반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640. 음악당이 개관할 무렵 구매한 640은 그 유일함으로 인해 전당을 찾은 무수히 많은 유명한 연주자들이 선택했던 피아노.

아마, 그 역사를 더듬을 모습으로 키신은 이 오래된 피아노를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전당에서 가장 인기 좋은 699. 밝고 힘찬 소리를 지녔다는 명장 조율사의 말에 더해, 연주자들에게도 이 피아노는 여전히 최고의 인기 피아노 중 하나다. 새로 구매한 309는 아직 싱싱한 탓에 힘찬 울림을 가지고 있는 피아노. 피아노의 선택만 놓고 이야기를 해 본다면, 음악당의 역사와 연주자들의 인기 그리고 새 피아노의 싱싱함. 이런 카테고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다음은 예브게니 키신의 피아노 선택과 연습.

4월 5일 한국 땅을 밟은 키신은 4월 6일 오전 10시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의 선택을 위해 무대에 3대의 피아노를 모두 꺼내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4월 1일 교향악축제를 시작했고, 매일매일 바뀌는 교향악단들을 위한 무대의 준비가 계속되어 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무대 스태프들은 5일 인천시립 교향악단의 공연 세팅을 말끔히 치우고 피아노 세 대만을 무대에 올린 채 키신을 맞았다. 6일 아침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온 키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직원이 음악당을 찾았다. 각 부서의 직원들이 삼삼오오 음악당에 모여 그의 리허설을 본다. 두 기획사의 공동주최로 성사된 이 공연.

예술의전당 한 부장과 한 직원은 이날 아침 키신의 피아노 선택을 두고 내기를 했다고 한다. 리사이틀홀에서 사용되는 피아노인 640은 일단 제쳐두고, 콘서트홀 전담 피아노인 309와 699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내기. 309에 만원을 베팅한 부장이 승리했고, 사탕을 가득 선물한 부장의 성의가 전당 내에서 아름다웠던 후일담 역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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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는 음악당 동쪽 구석의 소규모 연습공간인 실내악연습실로 옮겨졌고, 실내악연습실에서 키신은 무대에서 옮겨진 309를 가지고 연습을 시작했다. 엄청난 연습량을 보여준 키신은 6일부터 공연 당일인 8일까지 정말 계속 피아노만 친 것 같다. 연습이 시작되자 기획사의 직원이 의자 하나를 빌려달라고 한다.

용도는 키신 지키기. 그의 연습이 방해되지 않도록 실내악연습실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문지기를 한다. 키신이 피아노를 선택한 6일부터 공연이 열린 8일까지 예술의전당 음악당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의 피아노 소리, 일정상 무대에서 연습할 수 없는 지방 교향악단들이 리허설룸(현재는 챔버홀로 변모한)을 찾아 연습하는 소리, 콘서트홀 무대에서 당일 리허설을 진행하는 교향악단의 연습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말 그대로 3중주의 소리가 음악당을 가득 채운 행복했던 시간.

공연 당일, 7일 광주시립 교향악단의 무대를 말끔히 치우고, 다시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 4시간의 연습시간을 요청한 키신을 위해 무대를 준비한다. 당일 오전 연습은 예정 시간보다는 일찍 12시 30분쯤 연습이 끝났고, 키신은 일단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요청한 연습시간은 공연시간과 가장 가까운 오후 6시 30분부터 객석 오픈 시간인 7시 30분까지.

7시 20분쯤 1, 2, 3층 객석과 합창석을 정리하기 위해 안내학생(현재는 House Attendant)들이 객석으로 들어왔고, 정리하는 와중에 키신은 한국공연의 마지막 연습을 한다. 공연은 시작되었고, 키신은 베토벤의 소나타 두 작품과 쇼팽의 네 스케르초를 연주한다. 본 공연 프로그램의 예상시간은 110분이었지만, 앙코르에 관대하다는 키신은 90분이 더해진 앙코르 무대를 시작한다.

무대감독은 사전 일본 공연에서 열네 곡의 앙코르를 연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늘 앙코르는 조금 많을 것 같습니다" 하고 무전으로 공지를 한다. 앙코르 작품 수를 어떻게라도 알 수 없는 청중들은 곡이 하나하나 끝날 때면 조금씩 로비로 자리를 뜬다. 남은 청중들은 객석의 앞으로, 앞으로 모이고.

마치 아이돌의 콘서트 같다는 기획사 대표의 말을 뒤로하고, 키신은 하나하나 연주해 간다. 세 곡이 지나고, 네 곡이 지나고, 시간은 흐르고 흐르지만,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다는 젊고 열광적인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 팬들은 그의 앙코르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소리 지르며, 아낌없는 박수로 키신의 한국공연을 축하해 준다. 공연이 끝나고 예정된 로비에서의 사인회 때문인지, 기획사의 젊은 직원들은 무대감독을 재촉한다. 연주를 빨리 끝내게 도와달라고, 문을 닫아달라고 얘기를 하고. 하지만, 불을 올려달라는 언급은 하지 않으며.

익살스러운 키신은 일곱에서 여덟 곡쯤의 앙코르가 지날 때쯤, 직접 무대감독에게 문을 닫아달라고 얘기를 한다. 닫힌 문 바로 뒤에서 청중들의 박수를 음미하던 키신은 다시 문을 열어 달라고 말을 하고, 무대로 나가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인사를 보인다. 뻣뻣이 서서 빠른 속도로 상체를 내리는 그의 인사. 풍성한 머리가 찰랑대며 모든 청중의 기를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며, 다시 한 곡을 연주한다.

모두 열 곡을 연주했다. 열 번째 곡이 끝난 후, 키신은 무대감독에게, 문을 닫고 객석의 라이트를 올려 달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아직 그의 공연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키신은 문이 닫히고, 객석의 불이 밝혀진 후에도 무대 뒤를 잠시 떠나지 않았다. 마치 청중들의 박수가 여전히 계속된다면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자세로. 기획사 대표도 무엇인가 아쉬운 듯, "불을 다시 올릴까?" 하고 키신에게 묻는다. 본 공연과 거의 맞먹는 시간의 앙코르 공연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3개월의 시간과 3시간이 넘는 공연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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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하우스는 공연이 끝났지만, 각각 임무가 남았다. 무대는 9일 교향악축제 경기도립 교향악단 오전 리허설을 위한 무대 세팅을 해야 할 일이 남았고, 하우스는 객석을 꽉 채운 청중들이 줄을 선 키신의 사인회를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12시가 넘어 일이 끝난 무대와 새벽 2시쯤 귀가했다는 한 하우스매니저의 언급에, 그 길고 길었던 4월 8일 키신 공연을 위해 수고한 스태프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