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657조 '긴축 예산'…지출 증가율 2.8% '역대 최저' [2024 예산안]
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올해보다 2.8% 늘어난 656조 9000원으로 편성했다. 2.8%의 지출 증가율은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건전재정 기조로의 전환을 선언한 지난해 증가율(5.2%)의 절반 수준으로,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3%대 중반)를 감안하면 사실상의 예산 감축이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20조원 이상의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해 확보한 재정 여력을 빈곤·취약계층 복지에 대거 투입했다.

정부는 29일 국무회의를 열어 ‘2024년도 예산안’과 ‘2023~2027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의결했다. 내년 총지출 증가율(2.8%)은 재정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18년만에 가장 낮다. 문재인 정부 시절 편성한 2018~2022년 예산의 평균 증가율(8.7%)과 비교하면 30% 수준이다.

내년 예산안 편성을 앞두고 정부 안팎에선 지출 증가율이 3~4%대에 걸칠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전 부처에 이미 낸 예산요구안을 다시 짜올 것을 요구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지난해(24조원)에 이어 올해도 23조원 규모의 지출을 구조조정했다.

정부가 ‘메스’를 든 핵심 분야는 연구개발(R&D)와 보조금이다. 올해 31조1000억원에 달하는 R&D 예산은 16.6%인 5조2000억원이 삭감됐다. 구체적 목표 없이 소규모, 나눠먹기식 사업이 난립했던 것을 대폭 정리했다는 것이 기획재정부의 설명이다.

재정 감축 기조 속에서도 저소득층, 장애인, 노인 등을 대상으로 한 ‘약자 복지’는 지원을 대폭 강화했다.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수급 대상을 넓히고, 급여액도 역대 최대 수준인 13.2% 높이면서 관련 예산을 1조6000억원 늘렸다. 장애인 돌봄 서비스 예산도 4000억원을 증액했다. 현재 최대 1년인 육아 휴직 기간을 6개월 늘리고 영아기 2년 간 양육비용 지원을 1460만원에서 2000만원 이상으로 늘리는 저출산 분야 지원도 확대했다.

정부의 감축 노력에도 내년 관리재정수지 적자폭은 92조원 수준으로 올해 정부 전망치(58조2000억원)보다 악화될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대비 적자 비율도 3.9%로 올해(2.6%)보다 높아진다. 경기둔화·자산시장 침체로 내년 국세수입이 올해(400조5000억원)대비 33조1000억원 줄어든 367조4000억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내년 예산 증가율을 0%로 동결하는 문제까지 검토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9일 예산안 발표에 앞서 열린 기자단 브리핑에서 이 같이 밝혔다. 내년도 정부 지출 증가율을 재정 통계가 지출 중심으로 정비된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2.8%로 결정했지만, 막후에선 동결까지 논의할 정도로 재정 건전성 확보에 고심했다는 이야기다.

정부는 올해도 허리띠를 졸라맸다. 역대 최대 수준인 24조원의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한 올해 예산에 이어 내년도 23조원 가량을 구조조정하기로 했다.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가 5월말 제출한 예산요구안을 다시 돌려보내 1만개에 달하는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할 정도로 재정 감축에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나눠먹기·뿌리기식 관행이 이어져온 연구개발(R&D) 예산과 100조원로 늘어난 국고 보조금이 수술대에 올랐다. 구조조정으로 확보한 재원은 빈곤·취약계층 지원과 노인 일자리 등 복지·고용 분야에 집중 투입된다.

○무풍지대 R&D까지 ’메스‘

지출 구조조정 1순위론 그동안 예산 구조조정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R&D 예산이 올랐다. R&D 예산은 올해 31조1000억원에서 25조9000억원으로 5조2000억원이 삭감됐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 동력으로 여겨지며 2018년(19조7000억원) 이후 연평균 10.9%로 빠르게 늘어온 흐름을 멈춘 것이다.

정부는 R&D 예산이 파급력 있는 도전적 과제보다는 실패 가능성이 적은 ‘안전한 연구’에 낭비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마저도 대학·연구소 간, 연구자 간 나눠먹기식으로 흩뿌려지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대신 인공지능(AI), 첨단바이오, 양자 등 차세대 혁신 기술에 대한 투자는 4조7000억원에서 5조원으로 되려 강화하는 등 ‘선택과 집중’을 했다.

2018년 66조9000억원이었던 것이 4년 만에 102조3000억원으로 36조원 가까이 폭증한 국고 보조 사업에서도 4조원 가량을 들어냈다. 보조금을 받는 단체 대표의 친족 간 내부 거래로 부당 이득을 챙기거나 정치색이 짙은 강의를 편성 후 강사비를 지급하는 식의 사업들에 대한 지원을 삭감했다.

이른바 ‘이재명표 사업’이라 불리는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지원 예산은 작년에 이어 아예 올리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해 지역화폐 예산을 6050억원(2022년)에서 전액 삭감했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3525억원이 되살아났다. 코로나19 여파로 한시적으로 국고 지원이 이뤄졌지만, 원칙적으로 지방자치단체 자체 사업이라는 것이 기재부의 판단이다.

그 외에도 교육 예산과 일반·지방행정 예산이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지방교부금 등 국세 수입에 연동해 지방에 넘겨주는 재원이 줄면서 각각 6.9%(6조6000억원), 0.8%(9000억원) 줄었다.

○복지, 안전은 대폭 확대

긴축 기조 속에서도 보건·복지·고용 분야 예산은 올해 본예산(226조원)보다 16조9000억원이 늘어난 242조9000억원으로 뛰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생계급여액을 역대 최대 수준인 13.2%(21만3000원)를 높이고 선정 기준을 기준중위소득의 30%에서 32%까지 넓히는 등 취약계층 복지를 대폭 강화하면서다. 정부는 기초생보 등 저소득층 지원 예산만 1조6000억원을 늘렸다. 노인 일자리 확대(14만7000개), 독거노인 돌봄 확대(월16→20시간)등 노인 지원 예산도 2조2000억원을 늘렸다.

공공질서·안전 예산은 전년 대비 1조4000억원(6.1%) 늘며 총지출 증가율(2.8%)에 비해 증가폭이 컸다. 국방 예산도 2조6000억원(4.5%) 증가한 59조6000억원을 기록하며 높은 상승폭을 기록했다. 사회간접자본 예산은 1조1000억원(4.6%), 산업·중소기업·에너지는 1조3000억원(4.9%), 농림·수산·식품 분야 예산은 1조원(4.1%)씩 늘며 전체 평균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윤석열 정부가 집권 2년차 예산안의 지출 증가율을 2%대로 묶으면서 건전재정 기조로의 전환이란 공언을 지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중 연평균 8.7% 수준의 재정 확장을 했고, 윤석열 정부는 취임 후 처음 편성한 올해 예산안의 지출 증가율을 5.1%로 낮췄다. 향후 5년 간의 지출 증가율 전망치 역시 연평균 3.6% 수준으로 지난해(4.6%),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에 제시된 5.5%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뜨렸다.

다만 기초생활보장제도, 기초연금 등 법에 지급 의무가 명시돼 있어 정부가 임의로 줄일 수 없는 의무 지출의 비중이 가파르게 높아지는 것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2022년까지도 전체 총 지출의 50%를 넘지 않았던 의무지출은 올해 53.3%(340조4000억원)로 정부가 현안 대응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재량지출(298조7000억원)을 큰 폭으로 역전했다. 2027년까지 5년 간 연평균 증가율도 의무지출(5%), 재량지출(2%)로 커 격차는 점점 벌어질 전망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