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히트상품 '크라운 산도'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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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11, 고소한 과자 냄새 풍기던 동네
11, 고소한 과자 냄새 풍기던 동네
퇴근할 때 청파로를 따라가다 용산 넘어가는 고가를 타면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가 아래 오리온제과 공장에서 풍기는 과자 굽는 냄새다.
과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향수를 소환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과자 공장이 있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고소한 과자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 공장은 과자 틀 없이 오븐에 반죽을 적당히 올려 구웠기 때문에 과자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굽다가 깨진 것, 모양이 이상한 것, 너무 오래 구운 것 등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 많이 나왔다. 바가지를 들고 가면 이런 과자들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살 수 있었다. 모양은 안좋아도 방금 구운 과자는 바삭바삭하고 맛이 좋았다. 검게 탄 과자는 되레 식감도 좋았고 맛도 구수했다. 센베이 과자는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굵은 설탕을 입힌 과자를 먹고나면 혀가 까칠해지기도 했다.
10여년 전 ’국희‘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몇몇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희는 우리 토종 과자 회사 ’크라운제과‘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다. 드라마 종영 후 극 중 과자를 본떠 ’크라운 국희 땅콩샌드‘라는 과자를 출시해 화제가 됐다. 크라운제과의 오늘을 있게 한 과자가 산도다. 산도는 샌드의 일본식 발음이다. 샌드는 샌드위치의 줄임말로 산도는 비스켓 사이에 크림을 바른 ’과자 샌드위치‘인 것이다. 산도는 먹는 방법이 있다. 두겹의 비스킷을 분리하면 달콤한 크림이 나오는데 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아 맛을 보고 과자를 먹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자 공장은 모두 용산에서 시작했다. 용산역을 기준으로 왼쪽 모토마치(元町,원효로)에 일본인이 모여 살았고 오른쪽, 지금의 미군기지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 회사들은 군 부대에 건빵과 카라멜, 별사탕 등을 납품했다. 해태제과의 모체인 영강제과는 양갱과 캐러멜을 납품했다. 영강제과(남영동), 풍국제과(삼각지), 경성제과(후암동) 등 초기 제과 회사들은 용산역 좌우에 터를 잡고 일본인과 일본군에 납품했다.
적산 기업이 아닌 토종 제과 회사인 크라운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제과 회사인 해태제과를 인수했다. 이 회사에서 지금까지 팔리고 있는 것이 최장수 브랜드 ’양갱‘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의 풍국제과는 오리온으로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1967년 한국에 진출한 롯데제과를 비롯해 1990년대까지 국내 3대 제과 회사는 모두 일본과 연관이 있었다.
크라운제과의 모체가 되는 영일당제과소(永一堂製菓所)는 중림동 181번지에 있었다. 지금은 허름한 공장이 들어서 있다. 1947년, 해방 이후 전라남도 해남에서 상경해 양복 수선공으로 일하던 윤태현은 제과업계의 미래를 밝게 보고 중림동에 제과점을 차렸다. 신혼 시절 중림동의 한옥 부엌 한 칸을 전세 내 시작한 것이 영일당제과다. 어렵게 마련한 오븐을 설치하고 생산에 들어갔다. 크라운제과를 세운 윤태현의 평전, '식食은 생生이다'를 보면 우연히 받은 미국 C레이션(C Ration) 깡통 속 비스킷을 보고, 같은 과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샌드 비스킷을 만들기 위해서는 터널식 오븐과 샌드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관련 기술이 없었다. 당시 제과 기술은 카라멜과 사탕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방산시장에서 부품을 사다가 터널식 오븐을 만들었다. 비스킷은 40미터가 넘는 오븐을 설치해 골고루 열을 가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윤 회장은 고물상을 뒤져 찾은 부품을 이리저리 맞춰 생산 시설을 꾸렸다. 이렇게 구운 비스킷에 달콤한 크림을 넣어 '크라운 소프트산도'가 탄생한 것이다.
산도를 구하려는 상인들의 행렬이 중림동 언덕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그의 꿈은 하루에 사과상자 1천개 분량의 과자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중림동 언덕에는 나무상자가 산을 만들었고 마침내 1967년 9월18일 목표를 달성했다. 크라운제과는 지금도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기린다고 한다.
공장 가동에 들어가는 연탄의 양만 하루 540장이었다. 공장을 24시간 돌려도 주문량을 맞추지 못해 원효로에 제 2공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산도의 성공으로 제과 업계를 석권한 크라운은 1961년 전기오븐 누전사고로 공장이 전소돼 중림동 시대의 막을 내린다. 지금도 중림동의 고소한 과자 냄새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다. 비스킷 한 조각, 사탕 한 알을 먹더라도 맨손으로 놀라운 신화를 만든 이들의 노력을 기억할 일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과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향수를 소환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과자 공장이 있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고소한 과자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 공장은 과자 틀 없이 오븐에 반죽을 적당히 올려 구웠기 때문에 과자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굽다가 깨진 것, 모양이 이상한 것, 너무 오래 구운 것 등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 많이 나왔다. 바가지를 들고 가면 이런 과자들을 거의 공짜 수준으로 살 수 있었다. 모양은 안좋아도 방금 구운 과자는 바삭바삭하고 맛이 좋았다. 검게 탄 과자는 되레 식감도 좋았고 맛도 구수했다. 센베이 과자는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굵은 설탕을 입힌 과자를 먹고나면 혀가 까칠해지기도 했다.
10여년 전 ’국희‘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몇몇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희는 우리 토종 과자 회사 ’크라운제과‘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다. 드라마 종영 후 극 중 과자를 본떠 ’크라운 국희 땅콩샌드‘라는 과자를 출시해 화제가 됐다. 크라운제과의 오늘을 있게 한 과자가 산도다. 산도는 샌드의 일본식 발음이다. 샌드는 샌드위치의 줄임말로 산도는 비스켓 사이에 크림을 바른 ’과자 샌드위치‘인 것이다. 산도는 먹는 방법이 있다. 두겹의 비스킷을 분리하면 달콤한 크림이 나오는데 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아 맛을 보고 과자를 먹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자 공장은 모두 용산에서 시작했다. 용산역을 기준으로 왼쪽 모토마치(元町,원효로)에 일본인이 모여 살았고 오른쪽, 지금의 미군기지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 회사들은 군 부대에 건빵과 카라멜, 별사탕 등을 납품했다. 해태제과의 모체인 영강제과는 양갱과 캐러멜을 납품했다. 영강제과(남영동), 풍국제과(삼각지), 경성제과(후암동) 등 초기 제과 회사들은 용산역 좌우에 터를 잡고 일본인과 일본군에 납품했다.
적산 기업이 아닌 토종 제과 회사인 크라운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제과 회사인 해태제과를 인수했다. 이 회사에서 지금까지 팔리고 있는 것이 최장수 브랜드 ’양갱‘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의 풍국제과는 오리온으로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1967년 한국에 진출한 롯데제과를 비롯해 1990년대까지 국내 3대 제과 회사는 모두 일본과 연관이 있었다.
크라운제과의 모체가 되는 영일당제과소(永一堂製菓所)는 중림동 181번지에 있었다. 지금은 허름한 공장이 들어서 있다. 1947년, 해방 이후 전라남도 해남에서 상경해 양복 수선공으로 일하던 윤태현은 제과업계의 미래를 밝게 보고 중림동에 제과점을 차렸다. 신혼 시절 중림동의 한옥 부엌 한 칸을 전세 내 시작한 것이 영일당제과다. 어렵게 마련한 오븐을 설치하고 생산에 들어갔다. 크라운제과를 세운 윤태현의 평전, '식食은 생生이다'를 보면 우연히 받은 미국 C레이션(C Ration) 깡통 속 비스킷을 보고, 같은 과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샌드 비스킷을 만들기 위해서는 터널식 오븐과 샌드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관련 기술이 없었다. 당시 제과 기술은 카라멜과 사탕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방산시장에서 부품을 사다가 터널식 오븐을 만들었다. 비스킷은 40미터가 넘는 오븐을 설치해 골고루 열을 가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윤 회장은 고물상을 뒤져 찾은 부품을 이리저리 맞춰 생산 시설을 꾸렸다. 이렇게 구운 비스킷에 달콤한 크림을 넣어 '크라운 소프트산도'가 탄생한 것이다.
산도를 구하려는 상인들의 행렬이 중림동 언덕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그의 꿈은 하루에 사과상자 1천개 분량의 과자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중림동 언덕에는 나무상자가 산을 만들었고 마침내 1967년 9월18일 목표를 달성했다. 크라운제과는 지금도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기린다고 한다.
공장 가동에 들어가는 연탄의 양만 하루 540장이었다. 공장을 24시간 돌려도 주문량을 맞추지 못해 원효로에 제 2공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산도의 성공으로 제과 업계를 석권한 크라운은 1961년 전기오븐 누전사고로 공장이 전소돼 중림동 시대의 막을 내린다. 지금도 중림동의 고소한 과자 냄새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다. 비스킷 한 조각, 사탕 한 알을 먹더라도 맨손으로 놀라운 신화를 만든 이들의 노력을 기억할 일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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