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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집에 종이가 있길래 잘라서 딱지를 만들고 놀았어. 그랬더니 형이랑 아버지가 기겁을 하는 거야. 그 종이가 그냥 종이가 아니라 추사의 글씨였던 거지. 그때 이거 역사를 몰라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지.”

<신비 섬 제주 유산>을 쓴 역사 저술가 고진숙 씨가 제주 대정읍에서 만난 한 향토 연구자의 말이다. 제주 남서쪽 대정 지역은 조선 후기 서예가였던 김정희가 유배온 곳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형벌 제도를 가져와 중죄인을 수도에서 3000천리 밖으로 쫓아냈는데, 국토가 작은 조선에서 제주는 이 조건을 충족하기 가장 쉬운 유배지였다.

김정희를 가장 괴롭힌 건 음식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던 그에게 제주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집안 하인들의 부지런히 서울에서 음식을 내달랐다. 그 중엔 장도 있었다. 제주는 소금이 귀해 된장도 싱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정희는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났다. 고독한 유배인으로서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을 통해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의 최대 걸작인 ‘세한도’도 이때 그려졌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귀양 중인 자신을 잊지 않고 챙겨준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제주도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음식 [책마을]
<신비 섬 제주 유산>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저자는 제주에서 태어나 스무살에 섬을 떠났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제주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성장했다”고 말한다. 똥돼지가 부끄럽기도 했다. 오랜 뭍 생활로 제주가 잊힐 무렵, 다시 제주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가 어릴 적 그냥 지나쳤던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다시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본다.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똥돼지 문화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기후가 척박에 인간이 먹을 것도 모자랐던 제주에서 돼지를 키우기 위한 한 방책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에는 19세기 말 민란을 일으켜 읍내 성에 모인 한 남자의 고뇌가 나온다.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똥을 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엔 자기 집 돼지가 굶고 있는데, 아까운 먹이가 막 버려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지만 가독성이 좋다. 읽기 쉬운 편집과 구성이 눈에 띈다. 저자의 글솜씨도 한몫한다. 대학 때 천문기상학을 전공한 그는 간결하고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북촌리 대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기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