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어른 그리운 사회
세상 흉흉하다. 시민의 일상에서 보면 그렇다. 사건 사고가 빈발한다. 서울 신림역에서, 분당 서현역에서 선량한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살인 범죄가 일어난다. 피로사회, 위험사회의 징후가 농후하다. 멀쩡한 해병대 군인이 물에 휩쓸려 내려가 죽는다. 상관의 무리한 명령이 없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다. 세심한 성찰이 아쉽다.

언어폭력, 데이트폭력은 다반사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웃도는 게 오히려 부끄럽다. 분노와 저주와 갑질하는 우월의식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린다. 내 자식 인권만 중요하고 다른 집 자녀의 인권은 나 몰라라 한다. 이웃을 위한 존중과 배려도 내가 손해를 볼 때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지식은 홍수처럼 넘쳐나는데 지혜는 가물어 말라버린다. 나라의 어른들이며 지혜로운 조언자들은 어디로 갔나.

자고 일어나니 황당한 일이 또 생긴다.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았는데 학교 선생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옛적에 황매천 선생께서 국권 상실의 분함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일이 있지 않았나. 이 고결한 조선의 지성은 ‘어지러운 세상에 지식인 역할 하기가 힘들다(難作人間識字人)’는 비장한 시 구절을 남긴 분이다. 통재라, 오늘의 선생님은 학부모의 갑질에 시달리다가 인권 상실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 유명을 달리한다.

교육과 입법이 제 기능을 하면 흉흉한 세상을 위험천만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일이 터지고 나야 뒷북 수습으로 분주한 모습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국민을 향한 위로는커녕 상대방 탓하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은 누가 나무라나. 시인 윤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했는데, 이즈음의 부끄러움은 온전히 국민의 몫이다.

법이 정의와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않는다. 상식과 합리와 균형을 아우르는 지혜가 작동해야 더욱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민주사회의 법치주의가 고대의 천도(天道)나 부처님의 정법(正法)보다 효율적이라는 보증은 없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는데 정작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다. 급변하는 문화변동 시대에 디지털 낙오를 염려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문제의 한복판에 어른을 모시는 일은 빠를수록 좋다. 종교 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초청해야 하고, 원로세대의 활동 공간도 넓혀줘야 한다. 사회의 성문법을 다독거릴 수 있는 게 지혜의 불문율이다.

조직이나 기구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어른 존중하는 문화가 자생적으로 생겨나야 한다. 어른 없는 사회는 어지럽고 무도하다. 성자와 현자와 석학들이 더 이상 과거의 풍문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지혜로 조언하는 어른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