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부터 인간의 둥지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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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혜원의 파리통신
The community <Birding, a birdhouses exhibition 탐조>전시리뷰
The community <Birding, a birdhouses exhibition 탐조>전시리뷰
프랑스 파리의 문 닫은 허름한 미용실에서 전시가 열리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파리의 로맨티시즘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수많은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낭만일 것이다. 갤러리 더 커뮤니티(The community)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이전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서사가 있는 공간과 다듬어지지 않은 젊은 동시대 미술의 조화를,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들도, 전시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모두 새로워했다.
갤러리는 순탄하게 운영되다가 곧 위기를 마주한다.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이기 때문일까? 여느 도시든 현대 미술을 위해 탈바꿈한 새로운 공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다가 이내 그곳에서 쫒겨나 마치 ‘팝업 스토어’처럼 단기간 운영되고 사라진다. 그리고 The community도 그 운명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고 오래된 정비소와 그 옆 주택의 정원을 새로운 공간으로 발굴했다.
그중 정원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탐조(Birding, a birdhouses exhibition)라는 제목이 아이러니하게도 빈 새집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Birding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두 번째 기획전시이다. 2021년 1월 스위스 로잔 근처의 작은 마을 흐넝에서 작가들에게 자신만의 둥지들을 만들게 해 큐레이터의 집 뒷마당 각 네 군데의 모서리에 전시했던 것을 시작으로, 이번에는 파리 외곽의 팡탕(Pantin) 어느 수풀이 우거진 공간에서 또 다른 둥지를 틀었다.
첫 번째 는 흐넝뿐만 아니라 마르세유, 베를린에도 전시되었으며 이번 두 번째 전시는 아직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 갓 졸업한 신생 작가들, 로컬 작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을 모두 아우르는 조화를 이루어 그 창작으로 서로와 소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쯤에서 왜 이들이 새, 그리고 둥지에 이렇게 주목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마 새의 가장 대표적인 생물학적 특성인 날개가 인간에게 가장 비현실적인 것을 꿈꾸고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자유로워 보이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새들의 치열한 삶이 인간의 모습과 대비되면서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카루스와 그 아버지가 날고자 했던 것부터 어릴 때 그림으로나마 꿈꿔보았던 조그마한 천사 날개, 그리고 오늘날의 다양한 비행 기술 연구에 오기까지, 우리에게는 모두 한 번쯤 새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이 있다. 날개의 상징은 그러한 판타지적인 권력이고 새들은 모두 그런 낭만을 누리며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진다. 둥지 또한 그렇다, 집을 사기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해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새의 둥지는 비교적 건축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적고, 그에 반해 아주 포근한 집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더욱이 안정의 욕구가 충족되며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새들은 정말 이런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까? 전시의 비어있는 둥지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한 진짜 새들의 삶을 그들의 부재가 느껴지는 보금자리로 하여금 떠올려보게 한다. 나무와 풀숲으로 초록빛이 가득 얽힌 정원의 둥지들은 그 모양이 비록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전경을 보았을 때 귀엽고 조화로운 모습이 새들이 모여 살고 있는 평화로운 작은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둥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순간 우리가 상상했던 그 안일한 평화의 이미지는 깨지고 현실적으로 새들이 마주하는 위험과 혐오, 불안정함이 보이게 된다. 우리가 둥지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형태의 이 조형물은 자연에 노출된 새들의 위태로운 보금자리를 뱀들이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또한 그 옆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빈약한 플라스틱 옷걸이나 깃털이 듬성듬성한 하얀 브래지어 모양을 띤 둥지에 앉아 있을 새의 모습을 그려보면, 기성품 오브제가 주는 임시성이 인간의 산업발전으로 대체된 자연의 보금자리의 공허함과 이질감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플라스틱 혹은 유리 병뚜껑을 집 삼아 살아가는 다른 해양생물의 삶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판매 중이라는 팻말이 붙은 예쁘고 깔끔한 새것의 느낌이 물씬 나는 둥지 또한 인상적이다. 어떤 둥지보다도 더 튼튼하고 이상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안은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 도시의 잔뜩 지어져 있지만 비워진 신축아파트의 공간과 밖의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의 역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철사에 곤충들과 반짝이는 반지 등이 날아오르는 둥지 또한 그렇다. 외관의 귀여움과 화려함에 이끌리는 것도 잠시, 전체적인 둥지의 형상은 조류 착지 방지 시설물인 버드스파이크와 닮아있어, 도시에서 존재를 기피당하는 새들의 삶에 대해서 상기하게 된다. 이렇듯 새의 존재가 지워진 둥지들은 말한다. 인간들이 안정적인 주거 공간과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새들, 혹은 다른 자연 속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이 전시는 오롯이 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새의 둥지로 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그리고 그 삶 안에는 새의 삶을 꿈꾸는, 새와 더불어 살아가고, 때로는 새처럼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비친다.
갤러리는 순탄하게 운영되다가 곧 위기를 마주한다.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이기 때문일까? 여느 도시든 현대 미술을 위해 탈바꿈한 새로운 공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다가 이내 그곳에서 쫒겨나 마치 ‘팝업 스토어’처럼 단기간 운영되고 사라진다. 그리고 The community도 그 운명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고 오래된 정비소와 그 옆 주택의 정원을 새로운 공간으로 발굴했다.
<Birding 전시 전경>
그중 정원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탐조(Birding, a birdhouses exhibition)라는 제목이 아이러니하게도 빈 새집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Birding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두 번째 기획전시이다. 2021년 1월 스위스 로잔 근처의 작은 마을 흐넝에서 작가들에게 자신만의 둥지들을 만들게 해 큐레이터의 집 뒷마당 각 네 군데의 모서리에 전시했던 것을 시작으로, 이번에는 파리 외곽의 팡탕(Pantin) 어느 수풀이 우거진 공간에서 또 다른 둥지를 틀었다.
첫 번째 는 흐넝뿐만 아니라 마르세유, 베를린에도 전시되었으며 이번 두 번째 전시는 아직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 갓 졸업한 신생 작가들, 로컬 작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을 모두 아우르는 조화를 이루어 그 창작으로 서로와 소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쯤에서 왜 이들이 새, 그리고 둥지에 이렇게 주목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마 새의 가장 대표적인 생물학적 특성인 날개가 인간에게 가장 비현실적인 것을 꿈꾸고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자유로워 보이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새들의 치열한 삶이 인간의 모습과 대비되면서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카루스와 그 아버지가 날고자 했던 것부터 어릴 때 그림으로나마 꿈꿔보았던 조그마한 천사 날개, 그리고 오늘날의 다양한 비행 기술 연구에 오기까지, 우리에게는 모두 한 번쯤 새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이 있다. 날개의 상징은 그러한 판타지적인 권력이고 새들은 모두 그런 낭만을 누리며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진다. 둥지 또한 그렇다, 집을 사기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해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새의 둥지는 비교적 건축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적고, 그에 반해 아주 포근한 집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더욱이 안정의 욕구가 충족되며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새들은 정말 이런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까? 전시의 비어있는 둥지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한 진짜 새들의 삶을 그들의 부재가 느껴지는 보금자리로 하여금 떠올려보게 한다. 나무와 풀숲으로 초록빛이 가득 얽힌 정원의 둥지들은 그 모양이 비록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전경을 보았을 때 귀엽고 조화로운 모습이 새들이 모여 살고 있는 평화로운 작은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둥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순간 우리가 상상했던 그 안일한 평화의 이미지는 깨지고 현실적으로 새들이 마주하는 위험과 혐오, 불안정함이 보이게 된다. 우리가 둥지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형태의 이 조형물은 자연에 노출된 새들의 위태로운 보금자리를 뱀들이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또한 그 옆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빈약한 플라스틱 옷걸이나 깃털이 듬성듬성한 하얀 브래지어 모양을 띤 둥지에 앉아 있을 새의 모습을 그려보면, 기성품 오브제가 주는 임시성이 인간의 산업발전으로 대체된 자연의 보금자리의 공허함과 이질감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플라스틱 혹은 유리 병뚜껑을 집 삼아 살아가는 다른 해양생물의 삶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판매 중이라는 팻말이 붙은 예쁘고 깔끔한 새것의 느낌이 물씬 나는 둥지 또한 인상적이다. 어떤 둥지보다도 더 튼튼하고 이상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안은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 도시의 잔뜩 지어져 있지만 비워진 신축아파트의 공간과 밖의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의 역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철사에 곤충들과 반짝이는 반지 등이 날아오르는 둥지 또한 그렇다. 외관의 귀여움과 화려함에 이끌리는 것도 잠시, 전체적인 둥지의 형상은 조류 착지 방지 시설물인 버드스파이크와 닮아있어, 도시에서 존재를 기피당하는 새들의 삶에 대해서 상기하게 된다. 이렇듯 새의 존재가 지워진 둥지들은 말한다. 인간들이 안정적인 주거 공간과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새들, 혹은 다른 자연 속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이 전시는 오롯이 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새의 둥지로 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그리고 그 삶 안에는 새의 삶을 꿈꾸는, 새와 더불어 살아가고, 때로는 새처럼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