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 출신 '괴짜'들 뭉쳤다…몸집 키우는 '경의지회'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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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비슷한 삶을 삽니다. 6년제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각박한 수련 생활을 버팁니다. 이후엔 대학병원에 남아 교수가 되거나, 개원의로 살아갑니다. 안정된 인생을 뒤로하고 창업 전선에 뛰어들 때는 주변의 만류가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스타트업 대표들이 된 그들의 선택엔 각자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한경 긱스(Geeks)가 서울대 의대 출신 창업가들이 모인 동문회 ‘경의지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창업 배경은 달라도, “스타트업이 더 많은 환자를 살린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서울대 의대 출신들로 구성된 동문회 ‘경의지회’에 최근 창업가가 크게 늘고 있다. 스스로를 “경계에 선 의사들(경의)”라고 표현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경의지회는 2010년 조직된 모임으로, 서울대 의대 출신 중 병원 진료 이외의 일을 하는 의사가 주축이었다. 초대 회장은 신창재 교보생명 대표로, 정계·학계·법조계 인물이 자리를 채웠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창업가는 찾기 어려웠다.
100여명이 참여 중인 이 모임의 분위기가 변한 것은 약 3년 전부터다. 늘어난 유동성과 정부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동시다발적인 창업이 일어났다. 시장에선 동문인 서범석 루닛 대표가 기업공개(IPO)에 나서는 등 성공 사례가 나타나던 시기였다. 현재는 정신건강의학과·피부과·안과 등 여러 전문의 출신이 학번을 막론하고 시장에 뛰어든 상태다.
90학번대는 경의지회 창업가를 지탱하는 경력자 그룹이다. 4050 세대로 구성된 이들은 병원 재직 경력이 20년에 달한다. 분당서울대병원 초대 가정의학과장을 지낸 김주영 바이오뉴트리온 대표는 서울대 의대 92학번이다. 비만클리닉에서 대부분 세월을 보낸 그는 2020년 ‘인생 2막’을 열겠다며 창업을 택했다. 김 대표는 “업무는 의미 있었지만, 교수로서의 삶에도 끝맺음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비만 전문가로서 선택한 창업 아이템은 시중에 없던 지방간 디지털 치료제였다. “지방간은 체중의 10%를 빼야 하는 질환인데, 대학병원에선 약 처방 말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며 “인공지능(AI) 기반의 행동 교정 플랫폼을 기반으로 미국과 중동 시장 진출에도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우 큐티스바이오 대표(91학번)는 압구정 한복판에 피부과를 개원해 15년을 버텼다. 시간을 내서 의대 동기의 미생물 관련 사업을 도와주던 것이 스타트업을 차린 계기가 됐다. 최 대표는 “개원의 삶은 만족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의사로서의 역량이 좁게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미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특정 소재를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하며 시장 가능성에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2020년 창업에 뛰어든 최 대표는 현재 프랑스 로레알그룹, 카카오헬스케어와 미생물 기반 피부 항노화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 이혜준 카이헬스 대표(98학번)도 동문회에 참가하고 있다. 2004년부터 서울대병원 생활을 시작한 이 대표의 전공은 산부인과다. 실리콘밸리의 헬스케어 업체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창업 아이템으로 난임 치료를 잡았다. 이 대표는 “인공 수정에서 배아를 자궁으로 이식하는 과정은 여전히 의료진의 경험에만 의존하고 있다”며 “AI의 도움을 받아 정확도를 37%에서 65%까지 끌어올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개발한 솔루션은 분당서울대병원 임상시험을 거쳐 연내 유럽의 안전성 인증(CE mark)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대승 포트래이 대표(04학번)는 “IT 기술이 더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의사 중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연쇄 창업가 출신이다. 안과 전문의 경력을 지닌 그는 군의관 시절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아프리카를 돕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외부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2016년엔 첫 창업을 경험했고, 미국 헬스케어 업체에서 의료 데이터를 연구하기도 했다. 2021년 포트래이를 창업하고는 인체 조직의 위치 정보를 파악하는 공간전사체 기술 활용에 매진하고 있다. 이 대표는 “공간전사체 분석 시간을 줄여 북미 글로벌 제약사와 협업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연내 목표”라고 말했다.
경의지회의 영역은 넓어질 전망이다. 2010년대 학번 이후로 재학 중 창업 도전한 경우가 늘고 있어서다. 아직은 대학 동문회에서 활동할 연배가 아니지만, 선배 창업가와는 끈끈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는 스스로를 “대학가에서 쉽게 창업 지원 프로그램 찾아볼 수 있었던 세대”라고 표현했다. 고 대표는 치매를 예방하는 인지 기능 관리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미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편입한 그는 3학년이던 2020년 회사를 창업했다. 이혜성 에어스메디컬 대표는 4학년이던 2019년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촬영 시간을 AI로 줄여낸 에어스메디컬은 지난해 253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며 “AI 기술로 진료 예방의 영역을 혁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문회 내부에서도 ‘의사 창업가’ 역할 확대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각자가 지닌 전문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환자가 느끼는 ‘페인 포인트(불편 사항)’를 파악하는 능력이 여느 의료 스타트업 창업가보다 탁월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손지웅 경의지회 회장(LG화학 사장)은 “의사 창업가 증가 흐름은 서울대 의대의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단 시대 요구에 가깝다”며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는 의사들이 진료의 영역에 머물지만 않고, 창업으로 더 많은 이들의 건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서울대 의대 출신들로 구성된 동문회 ‘경의지회’에 최근 창업가가 크게 늘고 있다. 스스로를 “경계에 선 의사들(경의)”라고 표현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경의지회는 2010년 조직된 모임으로, 서울대 의대 출신 중 병원 진료 이외의 일을 하는 의사가 주축이었다. 초대 회장은 신창재 교보생명 대표로, 정계·학계·법조계 인물이 자리를 채웠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창업가는 찾기 어려웠다.
100여명이 참여 중인 이 모임의 분위기가 변한 것은 약 3년 전부터다. 늘어난 유동성과 정부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동시다발적인 창업이 일어났다. 시장에선 동문인 서범석 루닛 대표가 기업공개(IPO)에 나서는 등 성공 사례가 나타나던 시기였다. 현재는 정신건강의학과·피부과·안과 등 여러 전문의 출신이 학번을 막론하고 시장에 뛰어든 상태다.
창업으로 '인생 2막' 열었다
최원우 큐티스바이오 대표(91학번)는 압구정 한복판에 피부과를 개원해 15년을 버텼다. 시간을 내서 의대 동기의 미생물 관련 사업을 도와주던 것이 스타트업을 차린 계기가 됐다. 최 대표는 “개원의 삶은 만족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의사로서의 역량이 좁게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미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특정 소재를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하며 시장 가능성에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2020년 창업에 뛰어든 최 대표는 현재 프랑스 로레알그룹, 카카오헬스케어와 미생물 기반 피부 항노화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 이혜준 카이헬스 대표(98학번)도 동문회에 참가하고 있다. 2004년부터 서울대병원 생활을 시작한 이 대표의 전공은 산부인과다. 실리콘밸리의 헬스케어 업체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창업 아이템으로 난임 치료를 잡았다. 이 대표는 “인공 수정에서 배아를 자궁으로 이식하는 과정은 여전히 의료진의 경험에만 의존하고 있다”며 “AI의 도움을 받아 정확도를 37%에서 65%까지 끌어올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개발한 솔루션은 분당서울대병원 임상시험을 거쳐 연내 유럽의 안전성 인증(CE mark)이 진행될 예정이다.
"의사 창업가 역할 더 늘어날 것"
한 세대 어린 00학번대는 일찌감치 병원 밖을 향했다. 과학고와 공과대학 출신들이 본격적으로 의대와 의학전문대학원에 몰렸던 시대라 정보기술(IT)을 향한 관심도도 높았다는 설명이다. 대구과학고 출신의 문우리 포티파이 대표(03학번)는 “정신건강의학과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데, 1시간에 10명씩 환자를 봐야할 정도로 대원 의사 수는 부족했다”고 말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했던 문 대표는 수련 생활을 도중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포티파이는 우울감의 원인을 찾고 치료법을 알 수 있는 플랫폼을 운영한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3’에선 스마트폰으로 혈류를 확인해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하는 솔루션으로 혁신상을 받기도 했다.이대승 포트래이 대표(04학번)는 “IT 기술이 더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의사 중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연쇄 창업가 출신이다. 안과 전문의 경력을 지닌 그는 군의관 시절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아프리카를 돕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외부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2016년엔 첫 창업을 경험했고, 미국 헬스케어 업체에서 의료 데이터를 연구하기도 했다. 2021년 포트래이를 창업하고는 인체 조직의 위치 정보를 파악하는 공간전사체 기술 활용에 매진하고 있다. 이 대표는 “공간전사체 분석 시간을 줄여 북미 글로벌 제약사와 협업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연내 목표”라고 말했다.
경의지회의 영역은 넓어질 전망이다. 2010년대 학번 이후로 재학 중 창업 도전한 경우가 늘고 있어서다. 아직은 대학 동문회에서 활동할 연배가 아니지만, 선배 창업가와는 끈끈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는 스스로를 “대학가에서 쉽게 창업 지원 프로그램 찾아볼 수 있었던 세대”라고 표현했다. 고 대표는 치매를 예방하는 인지 기능 관리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미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편입한 그는 3학년이던 2020년 회사를 창업했다. 이혜성 에어스메디컬 대표는 4학년이던 2019년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촬영 시간을 AI로 줄여낸 에어스메디컬은 지난해 253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며 “AI 기술로 진료 예방의 영역을 혁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문회 내부에서도 ‘의사 창업가’ 역할 확대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각자가 지닌 전문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환자가 느끼는 ‘페인 포인트(불편 사항)’를 파악하는 능력이 여느 의료 스타트업 창업가보다 탁월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손지웅 경의지회 회장(LG화학 사장)은 “의사 창업가 증가 흐름은 서울대 의대의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단 시대 요구에 가깝다”며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는 의사들이 진료의 영역에 머물지만 않고, 창업으로 더 많은 이들의 건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