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편집장 레터

국내 ESG 공시제도 도입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당초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표준만 확정되면 국내 시행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린 택소노미, 탄소국경조정제도, 공급망 실사 등 ESG와 관련한 글로벌 규제가 밀려오고 있어 늦출 여유가 없습니다. 유럽과 미국은 이미 ESG 정보 공시 의무화 시간표를 확정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기업의 ESG 활동과 데이터 관리, 각종 규제 대응은 긴밀하게 연동되고 결국 공시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6월 말 ISSB 표준이 나왔는데도 웬일인지 금융위원회는 국내 도입 로드맵 발표를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3분기라던 공개 시점이 4분기로 연기됐지만, 이마저 확신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로드맵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알 수 없는 상태라 기업들은 미리 준비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공시의 기초가 되는 데이터 확보 등을 고려하면 금융위가 예고한 2025년 의무화는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당장 나올 것 같던 로드맵이 이처럼 늦어지는 건 뒤늦게 반대 의견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꼭 공시 의무화에 나서야 하느냐부터 논란입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면 공시 의무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과 기업 현실을 고려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모든 상장사를 대상으로 할지, 스코프 3 배출량을 포함할지, 사업보고서에 공시할지, 법정 공시로 할지, 제3자 인증을 필수로 할지 등 많은 쟁점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옵니다.

정광화 강원대 교수는 이처럼 혼란이 빚어지는 원인은 ESG 공시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제도 도입을 논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ESG 정보 공시가 왜 필요한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먼저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ISSB 기준은 환경 및 사회 리스크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단일 중대성’, EU의 유럽지속가능성 공시기준(ESRS)은 이와 더불어 기업활동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보는 ‘이중 중대성’에 기초한다고 설명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ESG 정보 공시 목적을 다르게 설정한 데서 비롯된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입니다.

EU는 탄소중립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기업의 실질적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반면 ISSB는 투자자들이 의사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목적을 한정합니다. 어떤 일이든 목적이 분명하면 세부 사항을 자연스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무엇을 위한 ESG 정보 공시인가’를 놓고 심도 있는 토론과 합의가 필요합니다.

올해 나온 국내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저마다 작심하고 만든 듯 양적·질적으로 지난해와 차원이 다른 모습입니다. 문제는 기업의 실행력이 아니라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 역량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편집장 레터] 무엇을 위한 ESG 정보 공시인가?
장승규 〈한경ESG〉 편집장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