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의 전설' 삽화가 피터 아르노가 21세기를 산다면? [2023 KIAF-프리즈]

미국 화가 데이비드 살레의 '생명의 나무' 연작
2020년부터 작업한 신문 삽화풍 회화
지금의 뉴요커 잡지 있게 한 피터 아르노 영감

세련된 유머와 희극적 구도로 역동적인 화면 구사
"리만머핀 서울 전시 끝으로 잠정적 시리즈 중단"

2023 Kiaf-프리즈서울 맞아 두 번째 내한한 살레
"인생이 멋지지 아니한가, 이토록 재미있지 않은가"

신디 셔먼·바바라 크루거 등과 70년대 '픽처스그룹'
광고와 만화 등 대중문화 적극 차용한 시각예술가들
37세 때 뉴욕 휘트니미술관 최연소 중견작가 회고전도

1925년 창간한 미국 잡지 '뉴요커'는 대공황을 거치며 지성인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헤밍웨이,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같은 지성인들의 기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류층 사회를 겨냥한 풍자 가득한 삽화와 한 줄짜리 지문, 그 자체로 작품이 된 표지의 일러스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걸 그린 이가 '전설의 삽화가'로 불리는 피터 아르노(1904~1968)다. 뉴요커 창간호부터 죽기 전까지 101개를 그렸다.

Tree of Life, Couple. 리만머핀 제공

100년 전 '한 장의 이미지'로 모든 것을 말한 그를 21세기에 소환한 작가가 있다. 미국 화가 데이비드 살레(71)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에 퍼진 2020년부터 아르노의 삽화를 차용해 'Tree of life(생명의 나무)'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르노의 삽화 속 인물들을 닮은 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두 세 장면으로 분할된 화면엔 마치 어떤 대화들이 오고가는 것처럼 보는 이들을 상상하게 한다. 희극적 요소와 추상적 장치들이 자유롭게 교차한다.

Tree of Life, The Artist

4일 서울 한남동 리만머핀에서 14점의 신작을 들고 개인전 '월드 피플'을 연 살레는 "인간의 삶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장면들이 있고, 그렇기에 인생이 얼마나 멋지고 재미있는 지를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Tree of Life, Gender Roles

아르노가 사회 풍자적 메시지를 던진 것처럼, 살레의 작품엔 의도적인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언뜻 보면 밝고 활기차고 역동적인 그림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불안하고 복잡하다. 화면의 한 가운데엔 주로 나무가 수직으로 자리잡아 등장 인물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엔 서로 다른 사건이나 상반되는 인물들의 표정이 연출된다.

Tree of Life, Muscles

이 시리즈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하단 3분의 1에 있다. 초기작에선 나무 뿌리가 있었고, 최근엔 추상적 이미지나 다양한 색채들이 배치됐다. 살레는 "캔버스의 상단엔 어떤 동작과 코미디적 요소를 두고, 하단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했다. 화면 위엔 포옹하는 남녀를 어떤 남성이 응시하고 있거나 키스하는 커플 옆에서 간절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또는 하품)하는 남자를 그려낸 식이다.

작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두고 "나는 작은 연극 무대를 연출한다"고 했다. 이해가 쉬울 것 같은 그림인데, 구체적인 서사를 명확히 읽어낼 수 없는 모호함이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그는 또 "피터 아르노는 신이 내려준 것처럼 나에게 왔다"고도 했다.

데이비드 살레 by Frenel Morris

살레는 1970년대 신디 셔면, 바바라 크루거 등과 '픽처스 제너레이션'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대중문화나 광고, 만화 등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기존 예술과 재조합해 독창성을 확보하는 이들이다.

20대 때부터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벌여 34세가 되던 1987년 뉴욕 휘트니미술관 사상 최초로 최연소 중견작가 회고전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런던 테이트모던, 뉴욕현대미술관 등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10월 28일까지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