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환경 탓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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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언덕에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대학 다닐 때다. 이삿짐 오기 전에 먼저 온 아버지는 지붕만 빼고는 모두 꼼꼼하게 살폈다. 문이란 문은 다 여닫아보고 수도꼭지는 물이 잘 나오는지를 살폈다. 집 감정하는 사람처럼 물을 부어 가며 하수구들도 빼놓지 않고 점검했다. 집 뒤 좁은 골목까지 둘러본 뒤, 이중으로 된 비탈진 텃밭을 살피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집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실개천 옆의 담벼락도 유심히 보았다. 한참 지나 아버지가 밖에서 불렀다.
아버지는 지팡이로 실개천을 건너는 나무뿌리를 가리켰다. 개천 바깥쪽으로 몇 가닥 나무뿌리가 드러나 보였다. 나무뿌리는 줄기가 되어 담벼락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와서야 그게 오동나무인 줄 알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나무여서 마당 한쪽을 넓은 이파리로 그늘을 만들었다. 의자를 갖다 놓고 앉자마자 아버지는 “참 멋진 벽오동(碧梧桐)이다”라고 확인하며 “봉황은 벽오동에만 둥지를 튼다고 해 조선 시대에 왕의 상징으로 많이 심었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화투에서 ‘똥’이라 부르는 건 오동나무 잎이다. 화투가 일본에서 넘어오면서 오동잎을 완전히 검게 칠해 못 알아볼 뿐이다. ‘똥광’의 새도 닭이 아니라 봉황이다”라고 설명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설명은 계속됐다. 나뭇결이 아름답고 습기와 불에 잘 견딜뿐더러 가벼우면서도 마찰에 강해 가구를 만드는 좋은 목재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를 대비하기도 했다. 소리를 전달하는 성질이 뛰어나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다. 거문고나 아쟁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로 제작한다.
아버지는 “오동나무가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넓은 잎 덕분이다. 어른의 얼굴보다 큰 오각형의 잎은 훨씬 더 많은 햇빛을 받을 수 있고 그만큼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낸다”며 “잎이 크니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뿌리도 아까 본 것처럼 길게 뻗었다.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개천을 건너고 담벼락을 뚫고 저렇게 무성하게 자랐다. 무서운 생명력이고 경탄할 순응력이다”라고 했다. 회사 부도나고 어렵게 장만한 집으로 이사한 것을 의식해서인지 이어 강한 어조로 “마치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일 수 없는 유한적 존재자인 인간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랐다. 저 벽오동이 우리 조상의 현신처럼 지켜줄 거다. 환경 탓하지 마라. 우연히 온 이 집 이름은 벽오당(碧梧堂)이다”라고 명명하며 “앞으로 우리에게 큰 복이 있을 거다”라고 의미를 부여해 낡은 집을 쳐다보던 가족의 투정을 잠재웠다.
아버지는 즐겨 쓰던 한시를 암송했다.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는 천 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일생에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으며[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으며[月到千虧餘本質], 버드나무 가지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柳經百別又新枝].” 조선 선조 때 4대 문장가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의 수필집 ‘야언(野言)’에 수록된 시라고 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의지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말이라는 설명도 곁들여서 했다. 뒤의 3, 4구절은 백범 김구 선생도 좋아해 서거 4개월 전에 휘호를 썼다고도 했다.
시간만 나면 아버지는 오동나무 그늘에서 쉬며 한시에 곡을 붙여 장구를 치며 시조를 읊었다. 꽤 비쌌던 판소리용 소고(小鼓) 북을 사다 드리자 오동나무를 얼른 키워 거문고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원하는 것보다 원치 않는 환경에서 어려운 선택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여기 서서 다른 곳만 쳐다본다고 내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다. 그게 순응성이다. 내 것이 되면 소중해진다. 저 오동처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힘을 기르라”라고 당부했다. 순응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먼저 배워 툴툴대는 손주들에게 얼른 가르쳐 물려줘야 할 소중한 덕성이다.
이 글을 쓰며 원전을 찾아봤다.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퇴계 이황(1502~1571)과 상촌 신흠(1566~1628)은 생존 시기가 다르다. 신흠이 5살 때 퇴계가 작고해 잘못 알려진 것 같다. 원전으로 알려진 신흠의 수필집 야언에 저 한시는 나오지 않는다. 추측건대 신흠보다 더 빼어난 미상의 작자가 지은 시로 보인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아버지는 지팡이로 실개천을 건너는 나무뿌리를 가리켰다. 개천 바깥쪽으로 몇 가닥 나무뿌리가 드러나 보였다. 나무뿌리는 줄기가 되어 담벼락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와서야 그게 오동나무인 줄 알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나무여서 마당 한쪽을 넓은 이파리로 그늘을 만들었다. 의자를 갖다 놓고 앉자마자 아버지는 “참 멋진 벽오동(碧梧桐)이다”라고 확인하며 “봉황은 벽오동에만 둥지를 튼다고 해 조선 시대에 왕의 상징으로 많이 심었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화투에서 ‘똥’이라 부르는 건 오동나무 잎이다. 화투가 일본에서 넘어오면서 오동잎을 완전히 검게 칠해 못 알아볼 뿐이다. ‘똥광’의 새도 닭이 아니라 봉황이다”라고 설명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설명은 계속됐다. 나뭇결이 아름답고 습기와 불에 잘 견딜뿐더러 가벼우면서도 마찰에 강해 가구를 만드는 좋은 목재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를 대비하기도 했다. 소리를 전달하는 성질이 뛰어나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다. 거문고나 아쟁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로 제작한다.
아버지는 “오동나무가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넓은 잎 덕분이다. 어른의 얼굴보다 큰 오각형의 잎은 훨씬 더 많은 햇빛을 받을 수 있고 그만큼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낸다”며 “잎이 크니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뿌리도 아까 본 것처럼 길게 뻗었다.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개천을 건너고 담벼락을 뚫고 저렇게 무성하게 자랐다. 무서운 생명력이고 경탄할 순응력이다”라고 했다. 회사 부도나고 어렵게 장만한 집으로 이사한 것을 의식해서인지 이어 강한 어조로 “마치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일 수 없는 유한적 존재자인 인간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랐다. 저 벽오동이 우리 조상의 현신처럼 지켜줄 거다. 환경 탓하지 마라. 우연히 온 이 집 이름은 벽오당(碧梧堂)이다”라고 명명하며 “앞으로 우리에게 큰 복이 있을 거다”라고 의미를 부여해 낡은 집을 쳐다보던 가족의 투정을 잠재웠다.
아버지는 즐겨 쓰던 한시를 암송했다.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는 천 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일생에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으며[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으며[月到千虧餘本質], 버드나무 가지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柳經百別又新枝].” 조선 선조 때 4대 문장가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의 수필집 ‘야언(野言)’에 수록된 시라고 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의지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말이라는 설명도 곁들여서 했다. 뒤의 3, 4구절은 백범 김구 선생도 좋아해 서거 4개월 전에 휘호를 썼다고도 했다.
시간만 나면 아버지는 오동나무 그늘에서 쉬며 한시에 곡을 붙여 장구를 치며 시조를 읊었다. 꽤 비쌌던 판소리용 소고(小鼓) 북을 사다 드리자 오동나무를 얼른 키워 거문고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원하는 것보다 원치 않는 환경에서 어려운 선택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여기 서서 다른 곳만 쳐다본다고 내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다. 그게 순응성이다. 내 것이 되면 소중해진다. 저 오동처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힘을 기르라”라고 당부했다. 순응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먼저 배워 툴툴대는 손주들에게 얼른 가르쳐 물려줘야 할 소중한 덕성이다.
이 글을 쓰며 원전을 찾아봤다.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퇴계 이황(1502~1571)과 상촌 신흠(1566~1628)은 생존 시기가 다르다. 신흠이 5살 때 퇴계가 작고해 잘못 알려진 것 같다. 원전으로 알려진 신흠의 수필집 야언에 저 한시는 나오지 않는다. 추측건대 신흠보다 더 빼어난 미상의 작자가 지은 시로 보인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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