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도 매혹적인 여성 예술가 12인의 삶과 작품 [책마을]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조지아 오키프(1887~1986)와 <데미안>을 쓴 소설가 헤르만 헤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원을 깊이 사모했다는 점이다. 헤세는 모든 생명체의 덧없는 순환과 아름다움의 비밀을 정원의 꽃을 가꾸며 깨달았다고 한다.

헤세에게 꽃은 자세히 봐야 예쁜 것이었다. 반면 오키프에게 꽃은 크게 봐야 예쁜 존재였다. 오키프는 꽃을 마치 카메라로 접사하듯 확대해서 그렸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너무 작아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매혹하는 미술관>은 오키프를 포함해 여성 예술가 12명의 삶과 작품을 소개한다. 마리 로랑생, 천경자, 수잔 발라동, 키키 드 몽파르나스, 카미유 클로델, 판위량 등이 그들이다. 저자가 힘들 때마다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 인물들이다. 책을 쓴 송정희는 뒤늦게 미술에 매혹돼 제주에 갤러리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10년 동안 영자 신문 ‘제주위클리’를 발행해 외국인들에게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기도 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1946~)는 세르비아 출신의 행위 예술가다. 1974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갤러리에서 6시간 동안 진행한 ‘리듬 0’으로 유명하다. 탁자 위에 72개의 물건이 놓였다. 장미, 깃털, 물이 채워진 유리컵, 채찍, 가위, 해부용 칼, 총과 탄알 등이었다. 관객은 이 물건으로 아브라모비치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그에게 장미를 건네고 깃털로 간지럽히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누군가는 장미 가시를 아브라모비치에 꽂거나, 옷을 찟거나, 입술에 상처를 냈다. 급기야 총알을 권총에 장전해 그의 머리에 겨누는 관객까지 등장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예술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렵고 두려운 것을 해본다.”

우리는 왜 그림에 매혹될까.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한다고 일컬어지는 그림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마음에 불쑥 들어오는 그림이 더 깊숙이 남는다”고 말한다. 책에는 그렇게 저자가 매혹된 작품들이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누군가의 크고 작은 슬픔을 치유해 줄지 모를 작품들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