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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모리 반도체의 자존심…중국 규제가 '오히려 호재'인 이유는 [글로벌 종목탐구]
미국의 강원도 '아이다호'서 시작한 반도체 회사
일본산 D램 침공에서도 정부 지원 통해 살아남아
中 규제에도 美 보조금 받고 뉴욕·아이다호 공장 신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의 HBM 경쟁 살아남아야

지난 3월 중국에서 들려온 소식이 반도체 업계를 출렁이게 했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이 한 기업을 특정해 인터넷 안보 심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하면서다.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표적이었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전체 매출의 11%인 4조원을 중국에서 벌었다. 마이크론 주가는 하루만에 5% 가까이 떨어졌다.

이 소식은 정말로 마이크론에게 악재였을까. 중국의 규제 조치 이후 반년 만에 마이크론 주가는 8.9% 오르며 반등했다. 연간으로는 39.59% 올랐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반도체 경기 한파의 기저 효과도 있겠지만 시장이 마이크론에 신뢰를 보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마이크론 주가는 왜 악재에도 다시 오른 걸까. 중국이 마이크론을 콕 집어 규제한 이유를 파악하면 주가가 오른 배경도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메모리 반도체의 자존심…중국 규제가 '오히려 호재'인 이유는 [글로벌 종목탐구]

"아이다호에는 두 가지 칩이 있다. 감자칩과 반도체칩"

마이크론은 1978년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스에 설립된 메모리 반도체 제조회사다. 쌍둥이 형제인 조와 워드 파킨슨이 보이스 한 치과진료소 지하에서 처음 사무실을 꾸렸다. 사람들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려는 파킨슨 형제를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봤다. 당시 인구가 91만명에 불과한 낙후 지역인 아이다호에서 왜 '반도체'냐는 의문이 담겼다.

아이다호는 감자 재배로 유명한 농업 지역이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와 비슷하다. 파킨슨 형제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다호 최고 부호인 '감자왕' 잭 심플롯(사진)을 찾아갔다.
'감자왕'으로 불린 잭 심플롯 전 J.R.심플롯 회장.
'감자왕'으로 불린 잭 심플롯 전 J.R.심플롯 회장.
당시 메모리반도체 시장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전까지 시장을 주름잡았던 인텔, AMD,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미국 기업이 주춤한 사이 NEC,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이 고성능 D램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D램 시장 80%를 일본 기업이 차지하기도 했다.

심플롯은 이 시기를 마이크론에 투자할 적기라고 봤다. 미국 메모리반도체 산업에 희망이 없다는 업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수십년 감자를 사고 팔며 공급 과잉 뒤에는 가격 상승이 따라온다는 시장 원리를 체득했다. 반도체도 다를 바 없었다. 미·일 기업 간 경쟁으로 반도체 가격이 내려간 뒤 다시 상승하는 주기가 온다고 내다봤다.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스시 마이크론 본사 전경. /마이크론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스시 마이크론 본사 전경. /마이크론
심플롯의 베팅은 적중했다. 1981년과 1984년에 버지니아주에 각각 64kb·256kb D램 제조 공장을 설립할 무렴 일본 기업들이 저가 제품을 판매하며 출혈경쟁을 유도했으나, 미국 정부가 반도체 반덤핑 상계 관세, 미일 반도체협정 등을 통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며 마이크론은 살아남았다.

이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도시바 등의 메모리반도체 사업 부문을 인수하며 마이크론은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났다. 시장조사기업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마이크론은 삼성전자(36.8%), SK하이닉스(22.8%)에 이어 18.7%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

미국에서 만드는 메모리반도체, 반도체법 최대 수혜 기대

마이크론의 강점은 사실상 미국의 유일한 D램 제조업체라는 점이다. 반도체는 연산과 제어 등 정보 처리에 쓰이는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와 정보를 저장하는 데 쓰이는 메모리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반도체는 다시 D램과 낸드플래시(낸드)로 분류된다. D램은 전원이 꺼지면 저장 정보가 사라지는 '휘발성 메모리'지만 처리 속도가 빠르고, 낸드는 비휘발성 메모리지만 처리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 따라서 D램은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낸드는 저장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전세계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해 파이를 나눠 갖는 '춘추전국시대'에 가깝다. 인텔(12.7%)을 빼면 두자릿수 점유율을 확보한 회사가 없다. 그 중에서도 미국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다. 인텔의 뒤를 잇는 퀄컴(7.4%), 브로드컴(5.2%), AMD(5.2%), 텍사스 인스트루먼트(4.1%), 애플(4.0%) 등이 모두 미국 회사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앞서 말한 세 기업의 '삼국지' 구도다. 시장점유율 4위인 일본 기업 키옥시아(6.9%)와 5위 웨스턴디지털(5.2%)이 합병할 경우 기존 구도를 흔들 수 있지만 아직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로이터
사진=로이터
미국의 고민은 AI, 자율주행차, 방산 등 첨단 산업을 육성하는 데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가 둘 다 필요하다는 점이다. 경제안보에 있어 반도체가 더욱 중요해지는 지금 마이크론은 메모리반도체를 지키는 유일한 미국 기업인 셈이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특정해 규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반도체 패권을 뒤흔들 수 있는 틈새가 있다면 바로 메모리반도체, 그 중에서도 마이크론이라는 얘기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공격하는 만큼 미국도 마이크론을 보호·육성하기 위한 조치를 적극 취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지원법의 수혜를 가장 많이 보는 기업 중 하나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9월 본사가 위치한 아이다호 보이시에 150억달러(약 20조원)을 투자해 초대형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바로 다음달에는 1000억달러(약 134조원)를 뉴욕 주에 투자한다고 선언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뉴욕 주 연설을 통해 마이크론의 투자 계획을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투자"라며 "미래에도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보장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삼성·하이닉스와의 HBM 경쟁 살아남을까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 경쟁은 마이크론이 넘어야 할 산으로 평가된다. HBM은 생성형 AI 시장이 커지면서 가장 각광받는 분야 중 하나다. 생성형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가 필요하고, 이 GPU에는 HBM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끌어올린 기술이다.

시장조사업체인 트렌드포스는 올해부터 2025년까지 HBM 시장 규모가 연평균 45% 커진다고 내다봤다. 올해 전세계 HBM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46~49%, 마이크론이 4~6%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메모리 반도체의 자존심…중국 규제가 '오히려 호재'인 이유는 [글로벌 종목탐구]
이에 루동휘 마이크론타이완 회장은 지난 7일 대만에서 기자들과 만나 "AI 시장의 수요 증가에 맞춰 HBM 생산을 위한 첨단 공정과 패키징 기술에 계속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널리스트 38명 중 26명(68.4%)가 마이크론 매수를 추천했고 보유와 매도 의견을 제시한 이는 각각 10명, 2명이었다. 12개월 목표 주가는 76.49달러다.

마이크론 매출은 2020년 214억4000만달러, 2021년 277억1000만달러, 지난해 307억6000만달러로 상승했다. 올해 매출은 반도체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154억5000만달러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