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대표적 직장가인 뱅크역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양병훈 기자
영국 런던의 대표적 직장가인 뱅크역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양병훈 기자
"기금형 퇴직연금 체제는 금융사들의 운용 수익률 경쟁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영국 런던의 노동연금부(DWP) 청사에서 만난 안드레아스 프리처드 연금정책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기금형은 연금 수탁기관의 기금운용위원회가 투자 결정을 내리는 유형을 말한다. 영국 퇴직연금은 과반수인 65%(2021년 가입자 수 기준)가 기금형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은 투자자가 직접 또는 디폴트옵션에 따라 펀드를 매수하는 계약형이 대부분이다. 계약형은 수탁기관이 달라도 투자할 수 있는 펀드가 비슷하기 때문에 기관별 운용 성과가 차별화되지 않는다.

프리처드 대변인은 "기금형은 각 수탁사의 운용위가 자기 책임 하에 유연하고 효율적인 투자 결정을 내리고 금융 소비자는 이 성과를 회사 별로 비교할 수 있다"며 "수익률이 좋은 곳에 돈이 몰리고, 경쟁을 통해 운용 수수료를 낮추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英 '시장 경쟁 촉진'으로 연금시장 발전

'경쟁'으로 발전한 영국 퇴직연금…"기금형 방식이 수익률 높였다"
기금형은 계약형보다 더 발전된 연금 운용 체제로 인식되는 게 일반적이다. 흥미로운 건 영국 정부가 기금형 퇴직연금을 의도적으로 확산시킨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런던에 본부가 있는 세계 2위의 재보험 회사이자 영국 퇴직연금 수탁 사업자인 AON의 매튜 아렌즈 영국연금정책본부장은 "영국의 퇴직연금이 기금형 우위로 만들어진 건 매우 이례적이며 우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그 배경에 '경쟁'이 있었다고 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영국 정부가 2012년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를 도입하며 퇴직연금 수탁 공공기관 'NEST(국가퇴직연금신탁)'를 설립한 일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증권사, 보험사, 은행 등이 큰 기업에 대해서는 퇴직연금 수탁 영업을 적극적으로 하겠지만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NEST는 이에 대응해 중소기업 등의 퇴직연금을 수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NEST는 여러 사업장에서 자금을 받아 운용위의 판단에 따라 투자를 집행하는 기금형이었다.

NEST는 빠르게 영향력을 키웠다. 그러자 민간 퇴직연금 수탁사가 NEST를 의식해 자사의 퇴직연금도 기금형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경쟁이 심화되자 수수료도 낮게 유지됐다. 법이 정한 퇴직연금 수탁 수수료 상한선은 0.75%인데, 지금도 대부분의 기금형 퇴직연금 수탁사는 이에 못미치는 0.3~0.5%를 받는다. 우리나라의 계약형 퇴직연금은 별도의 수수료가 없고 일반적인 펀드 수수료만 받는데도 영국과 비슷한 0.3~0.4% 선이다.

다니엘라 실콕 연금정책연구소(PPI) 정책연구본부장은 "자동가입 제도를 도입할 당시 업계에서는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이 큰 관심사였기 때문에 금융사들이 수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며 "이전에는 민간 퇴직연금이 대부분 계약형이었지만 이후 민간 부문에서도 기금형이 주류가 됐다"고 말했다.

경쟁의 효과는 수익률에서도 드러난다. 영국 연금 전문회사 펜폴드에 따르면 이 나라 퇴직연금은 최근 5년 동안 연 평균 약 7%의 수익률을 보였다. 8% 이상인 곳이 7곳이었고, NEST도 8.7%에 달했다. 펜폴드는 2021년 퇴직연금을 출시했는데 과거에도 자사 포트폴리오를 적용했다고 가정하면 수익률이 10.8%다. 우리나라의 DC형 퇴직연금 연 평균 수익률이 2~3% 선인 것과 대비된다.

물론 우리나라는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도입이 늦어진 게 수익률 부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기금형이지만 시장 경쟁을 하지 않는 한국 국민연금도 설립 뒤 연 평균 수익률이 5.11%(지난해 기준)에 그친다. 수익률에서도 경쟁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韓은 간단한 문턱도 못 넘고 있는 상황

우리나라에도 NEST처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퇴직연금 수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일명 푸른씨앗)'이 있다. 푸른씨앗도 NEST처럼 기금형으로 운용된다. 그러나 푸른씨앗은 지난해 9월 설립돼 이제 겨우 1년을 채웠고, 한국에서는 퇴직연금 납입이 의무가 아니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 자산운용 전문가는 "수탁고가 5000억원은 돼야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데 푸른씨앗의 수탁 규모는 아직 2000억원 수준"이라고 했다.

고용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27.1%(2021년 기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지 않고 회사가 알아서 퇴직자에게 목돈을 챙겨주는 옛날 방식의 퇴직금을 고수하고 있다. 퇴직연금 설정이 의무화되면 나머지 72.9%가 퇴직연금 시장으로 들어오면서 푸른씨앗의 수탁고도 순식간에 커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런 방안은 아직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일시금 수령을 원하는 사람이 이 방안에 반대할 이유도 없다. 회사의 제도가 퇴직금에서 퇴직연금으로 바뀌어도 근로자가 퇴직할 때 이를 일시금으로 받는데 거의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퇴직금'과 '퇴직연금 일시금 수령'의 차이는 돈을 회사 계정에 보관하는지, 회사 외 제3의 금융기관 계정에 보관하는지 밖에 없다. 퇴직연금으로 넣은 뒤 인출할 때 일시금 수령을 선택하면 이름만 '연금'일 뿐 실수령 형태는 기존 퇴직금과 같고 퇴직소득세도 같다. 우리나라는 이런 간단한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는 최근 디폴트옵션, 적립금운용위원회 등을 도입해 자산배분 전문성을 강화하고 있지만 기금형에 필적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영국 직장인 "연금이 현실적 노후 대안"

영국 런던의 대표적 직장가인 뱅크역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양병훈 기자
영국 런던의 대표적 직장가인 뱅크역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양병훈 기자
영국에도 우리나라처럼 목돈으로 집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런던은 지난 20년 간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라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가 됐고, 런던 시민들은 이 자산가격 상승에 올라 타 큰 부자가 된 집주인을 많이 봤다. 영국의 한 50대 직장인은 "연금이 중요하지만 집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며 "돈의 가치를 보존해 주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집값 때문에 '노후 대비를 위한 현실적인 방법'으로 연금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다.

런던의 한 40대 직장인은 "노후 생계를 위해 퇴직연금을 최대한 오래 부을 생각이며 연봉이 오르면 추가 납입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다른 40대 직장인도 "지금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는 첫 집의 LTV(담보인정비율)를 75%까지 인정 받을 수 있지만 나머지 25%의 현금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며 "금리 상승, 부동산 거품에 대한 부담 등을 안고 집을 사는 것보다 적극적인 금융 투자로 수익을 내는 게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영국 영주권자인 50대 김제이드씨는 "런던에서는 주택 임대인에게 부과되는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일반적인 근로자가 집을 소유해 월세를 받는 걸 노후 대책으로 고려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당장은 집을 못 사지만 은퇴 뒤 집을 산 사람도 많다. PPI에 따르면 65세 이상 잉글랜드 거주자의 주택 소유율은 2003~2004년 71%에서 2020~2021년 80%로 높아졌다. 이 기간 집값이 크게 오르면서 같은 지역 모든 연령층의 평균 주택 소유율이 71%에서 65%로 낮아졌는데, 고령층 주택 소유율만 유독 올라간 것이다. 직장 재직기간에 연금을 적립해 노후 생활비를 확보하고, 은퇴 뒤에는 집값이 싼 교외에서 내집마련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에서는 은퇴 뒤 높은 소득을 누리는 사람일수록 퇴직연금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PPI에 따르면 2020~2021년 합산 소득이 하위 20%인 부부는 소득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0%에 그쳤다. 중위 소득 부부에게서는 이 비중이 30%로 높아졌고, 상위 20% 소득 부부에게서는 38%로 더 올라갔다. PPI는 "퇴직연금은 국민연금 소득을 보충함으로써 직장을 다닐 때의 생활 수준을 퇴직 뒤에도 유지하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일시금 아닌 연금 수령 유도하는 英 정책

영국에도 퇴직연금 운용에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 런던의 자치구 킹스톤에 거주하는 연금 수급자 로버트 잭웰씨(65)는 "직장 생활을 할 때 회사 담당 직원의 도움으로 퇴직연금에 가입했고 어떻게 운용됐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잡화점 막스앤스펜서에서 일하며 퇴직연금을 납입 중인 자네트 로저스 매니저(55)는 "월급 4%를 더 받아봐야 금방 없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저축하는 셈 치고 납입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연 근로소득에서 최저소득(현 과세연도 기준 6240파운드로 약 1040만원)을 제외하고 남은 금액을 기준으로 4%를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납입하며, 사용자와 정부가 이 계정에 각각 3%와 1%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조해 준다.

하지만 기금형 퇴직연금을 통해 적정 수익률을 낼 수 있게 된 상황에서는 이런 반응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퇴직연금을 좋은 노후 보장 수단으로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퇴직연금을 굳이 빼려고 하지 않고 수십년 간 그냥 두는 '긍정적 무관심'의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처드 대변인은 "정부가 2012년 도입한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는 이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영국 정부의 정책 중 하나"라며 "근로자가 원하면 퇴직연금에서 탈퇴해 4%의 임금을 더 가져갈 수 있지만, 그러면 회사와 정부의 보조를 그냥 버리는 게 되기 때문에 잔류를 선택한 뒤 장기간 내버려 두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을 퇴직할 때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 인출하도록 유도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영국은 이와 관련해 2015년 '연금 자유화 정책'으로 오히려 제한을 풀었다. 이전에는 일시금 또는 분할 인출에 대해 55%에 달하는 고율의 세금을 부과해 종신연금을 거의 강제했지만, 이때 일시금과 연금 인출에 적용되는 세율을 같게 만들었다. 다만 일시금 인출을 요청하면 정부가 설립한 연금 전문 컨설팅 기관의 상담을 받게 함으로써 노후 준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돕는다.

"韓, 연금 수령 시 크레딧 부여 검토해야"

우리나라는 연금 인출을 유도하기 위한 정책이 거의 없다. 전문 상담기관이 없고, 일시금 인출에 대해 이미 세금을 너무 적게 받고 있어 연금 인출과의 세 부담 차이가 경미하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1억원 있는 20년 근속자가 이를 일시금으로 인출하면 내야하는 세금은 112만원이고, 연금으로 인출했을 때 절세되는 돈은 33만6000원(인출 기간 10년까지 30%) 또는 44만8000원(인출 기간 10년 초과 시 40%)에 불과하다. 설령 정부가 "연금 수령 시 세금을 한 푼도 안 받겠다"고 한들 추가로 줄 수 있는 혜택은 '112만원과 기존 절세액의 차이'로 80만원도 안 된다.

우리나라도 연금 인출을 유도하기 위한 상담기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둘 간의 실질적인 손익 차이도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가장 쉬운 건 과거에 영국이 했던 것처럼 일시금 인출 시 '세금 폭탄'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론의 반대 때문에 현실화하기 어렵고, 점점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하는 글로벌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송승준 노무법인 인사이트 대표노무사는 "일시금 인출에 대해 불이익을 주는 게 어렵다면 연금 인출에 대해 이익을 주는 방안을 고려해 볼 만하다"며 "크레딧(가입기간을 추가 인정해줘 더 많은 돈을 받게 하는 것) 부여가 연금 제도에서 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가장 널리 활용된다"고 했다. 사적연금인 퇴직연금에 크레딧을 주는 게 어렵다면 국민연금이나 기초연금과 연계해 이들에 대한 크레딧을 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국민연금에 대해 출산 크레딧, 군복무 크레딧을 주는 방안이 이미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데 여기 '퇴직연금 크레딧'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 방안을 국회 연금개혁위원회 소속 일부 의원이 검토하고 있다.

런던=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