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이지영
‘가고시안 제국’(Gagosian’s empire)이란 말이 있다. 1976년 미국 아트 딜러 래리 가고시안이 설립한 가고시안 갤러리에 ‘제국’이란 단어를 붙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 런던, 바젤, 아테네, 홍콩 등 세계 19개 도시에 지점을 낸 덕분에 그 옛날 대영제국처럼 ‘해가 지지 않는 왕국’이 돼서다.

가고시안의 연 매출은 1조원에 이른다.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팔린 미술품을 다 합친 금액에 버금간다. 웬만한 ‘글로벌 기업’ 뺨치는 화랑인 셈이다.

얼마 전 가고시안이 첫 한국인 디렉터를 임명한다고 발표했을 때 국내외 미술계가 술렁인 것은 그래서다. 가고시안은 5년 전 한국에 진출한 독일 갤러리 스푸르스마거스 출신의 이지영 디렉터를 영입하고 갤러리의 한국 확장 업무를 맡겼다. 외국계 화랑들은 다른 국가에 지점을 내기 전에 현지 디렉터를 통해 그 지역의 시장성과 아티스트 수준 등을 분석한다. “가고시안이 한국 지점을 내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미술가에서 나오는 이유다.

“서울은 매력적인 문화 도시”

닉 시무노비치
닉 시무노비치
이런 소문에 대답해줄 만한 사람을 지난 6~1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에서 만났다. 가고시안의 아시아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닉 시무노비치 시니어 디렉터다. 그에게 서울 지점 설립 가능성을 묻자 “서울처럼 문화 인프라가 촘촘히 짜인 도시는 드물다. 서울에 지점을 내는 것을 포함해 여러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가고시안이 아시아에 낸 지점은 2011년 문을 연 홍콩뿐이다. 가고시안이 서울에 갤러리를 내면 10여 년 만에 아시아에 새로운 지점을 설립하는 것이다.

시무노비치 디렉터는 서울이 매력적인 이유를 몇 가지 꼽았다. 먼저 ‘문화 인프라’다. 그는 “서울의 미술관 수는 아시아 다른 도시보다 훨씬 많다”며 “KIAF-프리즈 기간에 리움미술관과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을 방문했는데 전시 규모도 크고 수준도 높아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오랜 역사를 지닌 갤러리와 수준 높은 아티스트들, 정부가 문화사업을 육성하려는 것도 한국의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서울·홍콩은 대척점 아냐”

시무노비치 디렉터는 한국 컬렉터의 수준도 높다고 치켜세웠다. 그는 “한국 컬렉터들은 오랜 컬렉팅 역사를 갖고 있는 데다 근현대 미술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며 “이런 고객들과 일하는 것은 갤러리로서 매우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시무노비치 디렉터는 이런 이유를 들어 서울이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미술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홍콩은 아시아의 교통·물류 중심이란 지정학적 이점 덕분에 오랫동안 글로벌 갤러리들의 아시아 지역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며 “서울은 (후발주자지만) 홍콩 못지않게 성숙한 미술 인프라와 잠재 수요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고시안은 홍콩과 서울을 대척점으로 보고 둘 중 하나를 ‘아시아 허브’로 고를 생각이 없다”며 “두 도시의 장점을 잘 활용해 아시아 고객들과 더 자주, 더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게 가고시안의 지향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서울 지점 개설 여부가 단시간 내에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시무노비치 디렉터는 “가고시안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심사숙고하는 편이라 홍콩 지점을 낼 때도 4년을 고민했다”며 “서울 지점 역시 면밀하게 검토해서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영 디렉터도 “분위기에 휩쓸려 급하게 지점을 낼 생각은 없다”며 “한국에 지점을 낸다면 어떤 지역에, 어떤 스타일로, 어떤 프로그램으로 꾸밀지부터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