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달고 보스턴 대회 우승한 서윤복 이야기…하정우·임시완 주연
마라톤 결승선 앞 질주의 카타르시스…영화 '1947 보스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 사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당시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만 했던 사실도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보여준 장면으로 한국인의 기억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인 1947년 손기정이 자신의 뒤를 이을 유망주 서윤복의 감독이 돼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하고, 이곳에서 서윤복이 태극 마크를 달고 우승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찬 이 이야기를 '쉬리'(1999)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유명한 강제규 감독이 스크린에 재현해냈다.

그의 신작 '1947 보스톤'에서다.

이 영화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하정우)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얼굴이 어두운 건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그날의 울분을 삭이며 살아가던 그는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서윤복(임시완)의 훈련을 맡는다.

베를린 올림픽 때 동메달을 따 손기정과 함께 시상대에 올랐던 남승룡(배성우)이 조력자가 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해방 정국이라고 불리는 혼란스러운 시기다.

해방 직후 38선을 경계로 북쪽엔 소련군, 남쪽엔 미군이 들어왔고, 1947년 당시 남쪽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수립된다.

손기정이 이끄는 대표팀의 보스턴 마라톤대회 출전은 처음부터 갖은 난관에 부딪힌다.

미국에서 한국은 난민국으로 분류돼 대표팀의 입국에 거액의 보증금이 필요하고, 현지 보증인까지 세워야 한다.

이 영화에선 보스턴의 사업가인 한국 교민 백남현(김상호)이 보증인으로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보스턴에 도착하고, 백남현이 합류한다.

마라톤 결승선 앞 질주의 카타르시스…영화 '1947 보스톤'
이들이 보스턴에서 마주하는 난관들은 일제 강점기 손기정이 겪어야 했던 설움의 연장선에 있다.

영화는 대표팀의 설움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하이라이트인 보스턴 마라톤대회를 향해 간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마라톤 경기 장면은 15분 정도의 분량으로, 실제 경기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서윤복이 우승한다는 사실을 아는 관객도 상당한 박진감을 느낄 만하다.

서윤복이 결승선에 도달하는 순간, 손기정과 서윤복, 나아가 당시 한국인이 겪었을 모든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누군가는 한국인이 슬픔과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고 했지만, 서윤복은 마라톤 경기의 마지막 스퍼트로 폭발시키는 것 같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요소가 없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 슬픔과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이 주는 감동, 비행기를 타기도 쉽지 않던 시절 미국에 처음 가본 한국인들이 좌충우돌하며 빚어내는 웃음은 '1947 보스톤'을 가족이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만한 영화로 만들어낸다.

손기정을 연기한 하정우는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그의 절제된 연기는 과거의 좌절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손기정 역에 잘 맞는 듯하다.

임시완은 마라톤 선수를 상당히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출발선에 선 서윤복의 상기된 표정과 육체적 고통마저 잊은 듯 달리는 모습은 실제 마라톤 경기의 느낌을 자아내는 데 한몫한다.

그는 1997년 춘천 국제마라톤대회에서 한국 여자 마라톤 신기록을 세운 권은주 선수로부터 3개월 동안 현장 지도를 받았다.

강제규 감독은 천만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이번에도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내놨다.

그는 11일 시사회에서 '1947 보스톤'에 대해 "인간이 소중한 꿈을 이뤄나가는 승리의 도전"이라고 소개했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 보스턴이지만, 촬영은 호주 멜버른에서 이뤄졌다.

보스턴 마라톤대회는 봄에 개최됐지만, 영화는 겨울에 제작돼 촬영지를 남반구에서 찾았다고 한다.

'1947 보스톤'은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 김성식 감독의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과 함께 이달 27일 개봉해 추석 연휴 대목을 맞은 극장가에서 경합을 벌일 예정이다.

마라톤 결승선 앞 질주의 카타르시스…영화 '1947 보스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