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秋日作(추일작), 鄭澈(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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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시]
秋日作(추일작)
鄭澈(정철)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草蟲秋近床(초충추근상)
流年那可駐(유년나가주)
白髮不禁長(백발불금장)
[주석]
* 秋日(추일) : 가을날, 가을. / 作(작) : 짓다. ※ 이 시는 제목이 ‘우야(雨夜)’로 된 판본도 있다. ‘雨夜’는 비 내리는 밤이라는 뜻이다.
* 鄭澈(정철, 1536~1593) :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계함(季涵)이며 호는 송강(松江)이다.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와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 山雨(산우) : 산 비, 산에 내리는 비. / 夜(야) : 밤, 밤에. / 鳴竹(명죽) : 대나무를 울리다.
* 草蟲(초충) : 풀벌레. / 秋(추) : 가을, 가을에. / 近床(근상) : 침상에 가깝다. 이 ‘近床’이 ‘입상(入床)’으로 된 판본도 있다. ‘入床’은 침상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 流年(유년) : 흐르는 세월. / 那可駐(나가주) : 어찌 머물게 할 수 있으랴, 어찌 머물게 하랴.
* 白髮(백발) : 백발. / 不禁(불금) : 견디지 못하다, 감당하지 못하다. / 長(장) : 길다, 자라다.
[번역]
가을날에 짓다
산 비는 밤중에 대나무를 울리고
풀벌레는 가을이라 침상에 가깝네.
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하랴!
백발 자라는 걸 견디지 못하겠네.
[번역노트]
이번 칼럼의 시로 역자가 이 시를 고르게 된 것은 요즘에 딱 어울릴 만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몇 해 전 이즈음에 역자의 연구실로 한시를 공부하러 온 늙은 학생(^^) 한 분이 이 시의 제4구인 “白髮不禁長(백발불금장)”의 ‘禁’에 대한 해설을 요청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자가 그 임시에 작성했던 몇 줄의 해설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소략했던 듯하여 이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적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대구(對句)로 구성된 이 시의 제1구와 제2구는 문밖을 나서지 않고도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소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이다. 밤중에 대숲에 후득이는 빗소리가 마음에도 서늘하였을 터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환절기임을 직감하였을 텐데, 다시 어디선가 풀벌레의 울음소리까지 은은하게 들려온다. 이렇게 소리만으로 무더웠을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할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이를 기뻐함직도 하건만, 그리하여 그 기쁜 뜻을 담아 가을과 관계되는 좋은 일을 후속시킴직도 하건만, 시인은 이를 말하지 않고 느닷없이 흐르는 세월과 그 세월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무상감(無常感)을 얘기하였다. 가을이 와서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가는 세월이 안타깝다는 뜻이 더 크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환절기만큼 세월이 가고 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기도 없지 않은가!
“白髮不禁長”이라는 시구로 유명세를 더한 송강(松江)의 이 시는 시형(詩形)이 오언절구(五言絶句)이다. 주지하다시피 절구는 율시(律詩)와 더불어 근체시(近體詩:당나라 때 완성된 한시의 양식)의 중요한 축이 되고 있는데, 절구 역시 지을 때 매우 까다로운 격률을 준수해야만 한다. 그 옛날 중국에서 시로 과거 시험을 치르던 때는 작시(作詩)의 핵심적인 격률 하나만 깜빡하여도 본심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바로 탈락되었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한시 창작은 작사(作詞)이면서 동시에 작곡(作曲)이고, 격률 파괴는 곧 불협화음을 의미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근체시에서 형식률(形式律)이 중시되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체시의 격률 가운데 ‘이사부동(二四不同)’이라는 것이 있다. 두 번째 글자가 측성(仄聲:박자의 강약 가운데 강 정도로 이해해 두기 바람)이면 네 번째 글자는 평성(平聲:박자의 강약 가운데 약 정도로 이해해 두기 바람)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 글자가 평성이면 네 번째 글자는 측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두 번째 글자와 네 번째 글자의 평측(平仄:평성과 측성을 함께 이르는 말)은 달라야 한다는 격률이다. 시의 격률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시를 짓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노래로 부를 때 보다 아름답게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아름답게 들리느냐 하는 문제를 오늘날에 증명할 방법은 없다. 지어진 한시를 즉석에서 노래로 불렀던 전통이 이미 오래전에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白髮不禁長”의 ‘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두 번째 글자인 ‘髮’이 측성이므로 ‘禁’은 마땅히 평성이 되어야 하는데, ‘禁’이 평성일 때는 ‘감당하다, 견디다, 이겨내다’는 뜻이 되고, 측성일 때는 ‘금하다, 막다, 멈추다’는 뜻이 된다. 평성의 자리에 있는 ‘禁’은 당연히 평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다. 그리고 또 이뿐이 아니다. 시의(詩意)의 흐름으로 보더라도 ‘禁’을 ‘금하다, 막다, 멈추다’로 번역해서는 곤란하다. 왜일까? 제3구의 “流年那可駐”를 “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하랴”로 번역하였는데, 이 뜻은 흐르는 세월을 금하지[막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 구에서 다시 백발을 금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시의가 중복되어 시(詩)의 격(格)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된다. 이는 왕초보나 범할 만한 실수이므로, 정치적인 입장이나 인격과는 관계없이 시문(詩文)으로는 확실히 일가(一家)를 이루었던 송강이 범할 우(愚)는 절대 아닌 것이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시의 ‘禁’을 ‘금하다, 막다, 멈추다’로 번역한 것은 모두 오역이라 할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번역한 분들이 왜 오역인지를 알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데에 있다. 어법상 결코 무리가 없는 번역에서 스스로가 문제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역상의 오류를 역자는 ‘예정된 오역’으로 부른다.
역자의 지론이기도 하지만 번역은 정말 어렵다. 심지어 번역은 창작보다도 어렵다. 창작은 그저 자신이 아는 어휘(語彙)와 자신이 아는 구법(句法)으로 시를 엮기만 하면 될 뿐이지만, 요컨대 한시 번역은 그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살피고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정말 한 두 가지가 아니고, 또 대개 번역자의 학문적 깊이가 원작자의 학문적 깊이에 미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번역은 창작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번역으로 가는 길은 촉(蜀)으로 가는 길만큼이나 험하고도 멀다고 하겠다.
역자가 오늘 이렇게 한 글자의 번역을 두고 장황설을 늘어놓은 이유는 결단코 역자의 번역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구도 오역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번역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슬픈 숙명이지만, 적어도 ‘예정된 오역’만큼은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시의 격률에 좀 더 신경을 쓰며 번역에 임했으면 하는 조그마한 바램 하나를 여기에 부끄럽게 적어두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또 애초에 시인들이 단 한 글자를 두고도 자신이나 시간과 다투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더더욱 번역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아래에 첨부한 시는, 번역을 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고충 내지는 비애를 스스로 달래본 역자의 졸작이다. 시를 번역하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는 역자에게는, 이래저래 고충이나 비애의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업보(業報) 같은 게 아닐까 싶다.
獨酌自寬(독작자관) 홀로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하다
俗士夢千金(속사몽천금) 속된 선비가 천금을 꿈꿀 때
騷人爭一字(소인쟁일자) 시인은 한 글자를 다투는 법
積錢雖薄天(적전수박천) 쌓은 돈이 비록 하늘에 닿아도
不可增詩地(불가증시지) 시의 땅을 늘릴 수는 없으리라
역자가 오늘 소개한 송강의 「추일작」은 오언절구로 압운자가 ‘床(상)’과 ‘長(장)’이다. 칼럼의 편폭 문제 때문에 압운자인 ‘長’에 대한 해설을 곁들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2023. 9. 12.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秋日作(추일작)
鄭澈(정철)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草蟲秋近床(초충추근상)
流年那可駐(유년나가주)
白髮不禁長(백발불금장)
[주석]
* 秋日(추일) : 가을날, 가을. / 作(작) : 짓다. ※ 이 시는 제목이 ‘우야(雨夜)’로 된 판본도 있다. ‘雨夜’는 비 내리는 밤이라는 뜻이다.
* 鄭澈(정철, 1536~1593) :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계함(季涵)이며 호는 송강(松江)이다.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와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 山雨(산우) : 산 비, 산에 내리는 비. / 夜(야) : 밤, 밤에. / 鳴竹(명죽) : 대나무를 울리다.
* 草蟲(초충) : 풀벌레. / 秋(추) : 가을, 가을에. / 近床(근상) : 침상에 가깝다. 이 ‘近床’이 ‘입상(入床)’으로 된 판본도 있다. ‘入床’은 침상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 流年(유년) : 흐르는 세월. / 那可駐(나가주) : 어찌 머물게 할 수 있으랴, 어찌 머물게 하랴.
* 白髮(백발) : 백발. / 不禁(불금) : 견디지 못하다, 감당하지 못하다. / 長(장) : 길다, 자라다.
[번역]
가을날에 짓다
산 비는 밤중에 대나무를 울리고
풀벌레는 가을이라 침상에 가깝네.
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하랴!
백발 자라는 걸 견디지 못하겠네.
[번역노트]
이번 칼럼의 시로 역자가 이 시를 고르게 된 것은 요즘에 딱 어울릴 만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몇 해 전 이즈음에 역자의 연구실로 한시를 공부하러 온 늙은 학생(^^) 한 분이 이 시의 제4구인 “白髮不禁長(백발불금장)”의 ‘禁’에 대한 해설을 요청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자가 그 임시에 작성했던 몇 줄의 해설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소략했던 듯하여 이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적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대구(對句)로 구성된 이 시의 제1구와 제2구는 문밖을 나서지 않고도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소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이다. 밤중에 대숲에 후득이는 빗소리가 마음에도 서늘하였을 터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환절기임을 직감하였을 텐데, 다시 어디선가 풀벌레의 울음소리까지 은은하게 들려온다. 이렇게 소리만으로 무더웠을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할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이를 기뻐함직도 하건만, 그리하여 그 기쁜 뜻을 담아 가을과 관계되는 좋은 일을 후속시킴직도 하건만, 시인은 이를 말하지 않고 느닷없이 흐르는 세월과 그 세월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무상감(無常感)을 얘기하였다. 가을이 와서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가는 세월이 안타깝다는 뜻이 더 크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환절기만큼 세월이 가고 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기도 없지 않은가!
“白髮不禁長”이라는 시구로 유명세를 더한 송강(松江)의 이 시는 시형(詩形)이 오언절구(五言絶句)이다. 주지하다시피 절구는 율시(律詩)와 더불어 근체시(近體詩:당나라 때 완성된 한시의 양식)의 중요한 축이 되고 있는데, 절구 역시 지을 때 매우 까다로운 격률을 준수해야만 한다. 그 옛날 중국에서 시로 과거 시험을 치르던 때는 작시(作詩)의 핵심적인 격률 하나만 깜빡하여도 본심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바로 탈락되었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한시 창작은 작사(作詞)이면서 동시에 작곡(作曲)이고, 격률 파괴는 곧 불협화음을 의미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근체시에서 형식률(形式律)이 중시되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체시의 격률 가운데 ‘이사부동(二四不同)’이라는 것이 있다. 두 번째 글자가 측성(仄聲:박자의 강약 가운데 강 정도로 이해해 두기 바람)이면 네 번째 글자는 평성(平聲:박자의 강약 가운데 약 정도로 이해해 두기 바람)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 글자가 평성이면 네 번째 글자는 측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두 번째 글자와 네 번째 글자의 평측(平仄:평성과 측성을 함께 이르는 말)은 달라야 한다는 격률이다. 시의 격률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시를 짓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노래로 부를 때 보다 아름답게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아름답게 들리느냐 하는 문제를 오늘날에 증명할 방법은 없다. 지어진 한시를 즉석에서 노래로 불렀던 전통이 이미 오래전에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白髮不禁長”의 ‘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두 번째 글자인 ‘髮’이 측성이므로 ‘禁’은 마땅히 평성이 되어야 하는데, ‘禁’이 평성일 때는 ‘감당하다, 견디다, 이겨내다’는 뜻이 되고, 측성일 때는 ‘금하다, 막다, 멈추다’는 뜻이 된다. 평성의 자리에 있는 ‘禁’은 당연히 평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다. 그리고 또 이뿐이 아니다. 시의(詩意)의 흐름으로 보더라도 ‘禁’을 ‘금하다, 막다, 멈추다’로 번역해서는 곤란하다. 왜일까? 제3구의 “流年那可駐”를 “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하랴”로 번역하였는데, 이 뜻은 흐르는 세월을 금하지[막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 구에서 다시 백발을 금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시의가 중복되어 시(詩)의 격(格)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된다. 이는 왕초보나 범할 만한 실수이므로, 정치적인 입장이나 인격과는 관계없이 시문(詩文)으로는 확실히 일가(一家)를 이루었던 송강이 범할 우(愚)는 절대 아닌 것이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시의 ‘禁’을 ‘금하다, 막다, 멈추다’로 번역한 것은 모두 오역이라 할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번역한 분들이 왜 오역인지를 알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데에 있다. 어법상 결코 무리가 없는 번역에서 스스로가 문제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역상의 오류를 역자는 ‘예정된 오역’으로 부른다.
역자의 지론이기도 하지만 번역은 정말 어렵다. 심지어 번역은 창작보다도 어렵다. 창작은 그저 자신이 아는 어휘(語彙)와 자신이 아는 구법(句法)으로 시를 엮기만 하면 될 뿐이지만, 요컨대 한시 번역은 그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살피고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정말 한 두 가지가 아니고, 또 대개 번역자의 학문적 깊이가 원작자의 학문적 깊이에 미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번역은 창작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번역으로 가는 길은 촉(蜀)으로 가는 길만큼이나 험하고도 멀다고 하겠다.
역자가 오늘 이렇게 한 글자의 번역을 두고 장황설을 늘어놓은 이유는 결단코 역자의 번역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구도 오역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번역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슬픈 숙명이지만, 적어도 ‘예정된 오역’만큼은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시의 격률에 좀 더 신경을 쓰며 번역에 임했으면 하는 조그마한 바램 하나를 여기에 부끄럽게 적어두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또 애초에 시인들이 단 한 글자를 두고도 자신이나 시간과 다투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더더욱 번역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아래에 첨부한 시는, 번역을 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고충 내지는 비애를 스스로 달래본 역자의 졸작이다. 시를 번역하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는 역자에게는, 이래저래 고충이나 비애의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업보(業報) 같은 게 아닐까 싶다.
獨酌自寬(독작자관) 홀로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하다
俗士夢千金(속사몽천금) 속된 선비가 천금을 꿈꿀 때
騷人爭一字(소인쟁일자) 시인은 한 글자를 다투는 법
積錢雖薄天(적전수박천) 쌓은 돈이 비록 하늘에 닿아도
不可增詩地(불가증시지) 시의 땅을 늘릴 수는 없으리라
역자가 오늘 소개한 송강의 「추일작」은 오언절구로 압운자가 ‘床(상)’과 ‘長(장)’이다. 칼럼의 편폭 문제 때문에 압운자인 ‘長’에 대한 해설을 곁들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2023. 9. 12.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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