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사이트 보도자료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사이트 보도자료
이어지는 전시실들을 거쳐 복도 끝에 도달하면 검은 벽이 나타난다. 그 어두움 안으로 들어가 길을 따라 걸으면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공간의 벽과 바닥에 펼쳐진 붉은 색은 지구의 흙을 닮았고 가느다란 봉들이 촘촘하게 달린, 끝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시꺼먼 천장은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가만히 서있으면 마치 다른 차원의 우주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라보이는 시선의 끝에는 반가부좌 자세로 앉아 몇 백 년에 걸친 사유를 이어가는 반가사유상들이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 중 두 개의 반가사유상만을 전시하고 있는 '사유의 방'이다. 관람객들이 진입한 지점에서 반가사유상까지의 거리는 대략 22m로, 저 멀리 보이는 반가사유상을 보러가기 위해 사람들은 이동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거리를 좁히며 반가사유상에게 가까워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

모서리가 둥글어 벽의 경계도 뚜렷하지 않은 이 단일한 공간에는 오로지 두 개의 반가사유상과 이들이 놓여있는 타원형의 무대만이 ‘보인다’. 그래서 저기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관람객이 처음 도달한 위치보다 반가사유상이 있는 지점의 위치가 조금 높으며 이로 인해 반가사유상까지 가는 길은 미세한 경사로가 되기 때문에 평지를 걷는 것 이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높이 선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가상유상을 올려다보게 된다.

벽 또한 수직으로 서 있지 않다. 벽은 높아질수록 점차 공간의 바깥을 향해 기울어져 바닥보다 천장이 더 넓은 면적을 갖게 된다. 이 벽은 또한 반가사유상을 향할수록 양쪽으로 열려 수직 수평방향이 모두 기울기를 가진 공간을 형성한다. 이처럼 이 공간은 벽-바닥-천장이 직교하며 형성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공간의 모든 축이 미묘한 기울기를 가지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그리고 이 미묘함은 사람들의 시각적인 경험이 아닌 ‘몸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며 사유의 영역에 다가가는 길을 쉽지 않게 만든다.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사이트 보도자료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사이트 보도자료
공간이라는 단어는 한자로 빌 공(空), 사이 간(間)자를 쓴다. 무엇이 채워져 있는 상태 보다는 비어있는 상태 그대로를 의미함을 단어의 뜻이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즉 벽, 바닥, 천장이 만드는 특정한 형태의 내부 영역을 공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적 경험'은 근본적으로 비어있는 그 형태에 의해 발생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이 공간은 다른 매체들보다 인간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닿아있으며 신체가 일상을 영위하는 물리적 배경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신체의 상태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기분이나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많은 유물들을 경험하는 방식이 대체로 시각에 의존한다면 사유의 방은 일상의 차원을 벗어난 공간을 몸이 경험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공간 그 자체가 온전하게 전시가 될 수 있도록 한다. 오로지 반가사유상만이 존재하는 空間을 통해 이 경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공간 경험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공간에 오래 머물면서 걸어보고, 미세한 변화도 느껴보고, 반가사유상의 주위를 돌아보고, 가만히 서서 응시도 해보며 이 공간을 통해 반가사유상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천천히 느껴볼 필요가 있다. 반가사유상처럼 한 자리에 앉아 사유의 시간을 갖지 않더라도 관람객들에게는 그 과정이 하나의 사유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공간에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다녀갔다. 누군가는 입구에서부터 빠르게 걸어와 반가사유상을 잠시 보고 재빨리 나가기도 했고, 누군가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나가기도, 누군가는 사진만 찍고 나가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이 필요한 방식으로 반가사유상을 경험하는 방식이었을 테지만 조금만 더 머물렀다 가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관람객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천천히 공간의 중앙으로 걸어와서 바닥에 앉아 한참동안 반가사유상을 바라봤다. 그러고 나서는 천천히 다가가 반가사유상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천천히 입장한 위치로 돌아가 멀리서 반가사유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전시실을 나갔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타인이 사유하는 과정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이 동떨어진 우주 같은 공간에서 당신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쫓아나가 물어보고 싶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