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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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이 반등세다. 미국과의 ‘데탕트(관계 개선)’ 가능성에 베팅하는 채권 투자자들이 늘면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감산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미국이 또 다른 원유 부국인 베네수엘라와의 관계를 활용해 유가 안정을 꾀할 거란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1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달러당 8~9센트 수준에서 거래되던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이 최근 몇 주 새 달러당 10~11센트로 올랐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외교적 협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제재 완화를 이끌어낼 확률이 커졌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베네수엘라 국채로 유입된 투자 자금이 늘어난 덕이다. 한 베네수엘라 국채 보유자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과 직결되는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마두로 정권과의 협상을 타결하길 원한다”며 “미국으로의 베네수엘라 이주민 유입과 사우디‧러시아의 원유 시장 압박 시도가 그것”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감산 조치를 연말까지 연장한 가운데 미국이 베네수엘라산 원유 공급량을 늘려 국제유가를 안정시키려는 구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 정부는 2020년 마두로 정권 제재 차원에서 취했던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입 규제를 지난해 11월 전격 완화했다. 미 정유사 셰브런은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 PDVSA와의 합작을 통해 올해 1월부터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들였다.
유가 오르자 베네수엘라 '몸값'도 뛴다…국채 가격 반등 랠리
사우디‧러시아의 감산 연장으로 국제유가가 상승세를 지속하자 베네수엘라에 대한 추가 규제 완화를 검토하고 나선 셈이다. 스페인 일간 엘파이스는 30억달러 규모 베네수엘라 자산에 설정된 동결 조치가 조만간 해제될 전망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익명의 소식통은 FT에 “1~2주 내로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올 수 있다”며 “양국이 더 넓은 범위에서 합의에 성공, 단일 성명에 그치지 않고 관계 정상화를 위한 여러 조치가 한 번에 발표될 것”이라고 전했다.

대(對)베네수엘라 제재 완화를 반대해 온 미 공화당 의원들마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러시아산 석유가 제재 대상에 오르자 대체 공급원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데 동조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흥시장 전문 자산운용사인 그레이록캐피털의 한스 흄 최고경영자(CEO)는 “미국과 베네수엘라 간 협상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추측이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을 밀어 올리고 있다”며 “회담은 언제든 결렬될 수 있지만, 우리는 (양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오랜 기간 일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국채에 투자한 경험이 있는 에드워드 코웬 윈터브룩캐피털 디렉터도 “베네수엘라는 변곡점에 진입했다”며 “미국과의 해빙기가 본격화하면서 최근 몇 달 새 유럽 시장 투자자들의 관심도 커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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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은 2022년 3월 미국이 후안 곤잘레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 국장을 필두로 한 대표단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한 이후로 1년 넘게 제재 완화 협상을 이어오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협상 진행 상황과 관련해 “우리는 베네수엘라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보장되는 대가로 이 나라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는 논의에 임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현재 진행 중인 외교적 대화와 관련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이 현재의 7~8배 수준으로 뛸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2021년 말부터 베네수엘라 국채를 보유해 온 닉 로슨 오션월 최고경영자(CEO)는 “쿠바 국채가 6센트, 천연자원이 전무한 레바논 국채가 11센트에 거래되고 있다”며 “3~4년 내로 (베네수엘라 국채 투자를 통해) 75센트의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단언했다.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은 이 나라가 2017년 600억달러의 외채를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직후 급격히 하락했다. 이어 2019년 JP모간이 신흥시장(EM) 지수에서 베네수엘라 채권을 제외한 것을 계기로 폭락세는 더욱 가속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마두로 정권의 독재 체제 견제를 위한 ‘최대한의 압박’ 기조를 토대로 베네수엘라 국채 거래를 엄격히 규제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압박 전략은 결과적으로 마두로 정권을 퇴출시키지 못했고, 700만명이 넘는 난민을 만들어냈을뿐 아니라 베네수엘라가 중국, 러시아, 이란과 더욱 밀착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