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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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은 체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체스판 위에서는 이길 자가 없었지만 체스판 밖에서 방황했던 한 체스 천재에 대한 이야기다.

체스의 복잡한 규칙은 몰라도 괜찮다. 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동료들과도 원만하게 지내지만 퇴근 후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낀다면, 일로 인한 불안과 압박감을 술과 담배로 풀고 있다면 이 드라마에 빠져들 수 있다. 2020년 공개된 퀸스 갬빗이 그해 넷플릭스 TV 시리즈 전 세계 1위에 오르고,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인 에미상에서 ‘최우수 미니시리즈’ 작품상을 넷플릭스에 최초로 안겨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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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엘리자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 분·이하 베스)는 9살에 고아가 되어 보육원에 보내진다. 정신질환을 앓다 동반자살을 하려 했던 어머니 앞에서 그는 혼자 살아남았다. 보육원에서 엄마가 수를 놓아준 옷을 빼앗기고, 머리카락이 잘리고 아이들 수십 명과 한 방을 쓰는 것을 베스는 말없이 받아들인다.

낳아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의 마음이 멀쩡할 수는 없다. 아이비리그 수학과 박사였던 어머니의 모습은 딸인 그가 물려받았을 탁월한 두뇌와 예민한 정신을 짐작케 한다. 보육원에 와서 깨달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엄청나게 똑똑하다는 점은 불안을 키웠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통제하려 지급한 안정제에 베스는 쉽게 중독된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체스는 베스의 ‘다름’을 칭찬하고 흠모하는 세계다. 베스는 보육원 건물 관리인 샤이벌 씨가 체스를 두는 모습을 보면서 체스에 매료된다. 체스는 따뜻한 게임은 아니다. 체스판에서는 동료와의 연대도 유머도 없다. 수많은 확률을 따지며 냉정하게 상대를 몰아붙이고 자신의 말들을 거리낌없이 희생해야 이길 수 있다. 상대를 얼마나 빨리, 압도적으로 정복했는지가 실력의 기준이다. ‘퀸스 갬빗’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체스판의 말인 폰을 희생하는 전략의 이름이다.

베스는 공격적인 체스로 세상에 자신을 알린다.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그의 앞에 앉은 사람들은 나이와 성별이 무관하게 무너진다. 사람들은 남자들의 세계였던 체스판에 돌연 등장한 천재 소녀를 칭송하고, 베스는 엄청난 돈과 명예를 거머쥔다.

어느 것도 그의 내면을 채워주지 못했다. 공격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마침내 승리를 거뒀을 때의 쾌감과 성취감, 사람들의 선망어린 시선은 잠시나마 불안을 잠재웠다. 안야 테일러 조이가 비하인드에서 말했듯 “베스는 승리에 중독된다.” 체스판의 말을 희생시키듯 학교도 일상도 포기한다. 금단 현상은 가혹하다. 체스 세계 1인자인 소련의 보르고프에게 패했을 때, 경기를 망친 스스로에게 환멸이 몰려올 때마다 베스는 의식을 흐릿하게 해주는 술과 안정제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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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도 모를 만큼 약물에 중독돼 있던 베스를 깨운 것은 샤이벌 씨의 죽음이다. 보육원 친구 졸린과 함께 샤이벌 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어린 시절 체스를 뒀던 보육원의 지하실을 찾아간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한쪽 구석에서 베스는 무뚝뚝했던 샤이벌 씨가 벽에 오려 붙여둔 자신의 기사와 사진들을 발견한다. 지역 대회에서 처음 우승해 신예로 떠올랐을 때, 미국 챔피언이 됐을 때, 세계 대회에 출전해 보르고프에게 패했을 때…. 그리고 체스를 처음 배우던 시절 함께 찍은 사진까지.

그제서야 베스는 깨닫는다. 체스 신동이 되기 전부터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존재 자체로 누군가의 자랑이라는 것을. 남을 정복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남는 수단이었던 체스는 사실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했다는 것을. 부모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 있던 시절 그의 마음을 채워준 건 승리의 쾌감보다는 주위의 따뜻한 애정이었다는 것을.

이후 소련에서 열린 체스 대회에서 보르고프와 맞붙는 그를 위해 한데 모여 전략을 연구하는 미국의 체스 선수들을 보며 베스는 이를 새삼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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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고프와의 경기 후 베스는 체스판의 가장 강한 말인 퀸처럼 흰 모자와 흰 코트를 입고 길거리로 나간다. 노인들이 체스를 두고 있는 소련의 공원에서 그는 편안함을 느낀다. 베스는 자신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하는 노인들에게 둘러싸이고, 나이 지긋한 노인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앉는다. 눈을 반짝이며 깍지 낀 손에 턱을 괴는 특유의 포즈 속 불안과 강박은 사라지고 없다. 보육원 지하실에서 샤이벌 씨에게 체스를 처음 배우던 때처럼.

퀸스 갬빗은 성공과 승리만이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 믿고 고군분투하던 한 인간이 공동체에 천천히 스며드는 이야기다. 베스처럼 치열하게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아 괴로운 이들에게 드라마는 전한다. 꼭 천재가 아니어도, 당신의 마음을 채워줄 소중한 관계가 분명히 있다고. 단지 잠시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