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4월. 손기정(하정우 분) 감독, 남승룡(배성우) 코치 겸 선수와 서윤복(임시완) 선수로 구성된 조선 마라톤 대표단이 온갖 난관을 뚫고 미국 보스턴에 도착한다.

이들은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주관하는 협회에서 선수 유니폼을 받고는 아연실색한다. 유니폼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어서다. 독립 국가가 아니라 미군정이 통치하는 난민국 선수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돼서 그렇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출전 거부’ 기자회견을 자청한 손기정은 회견장에 모인 세계 각국의 기자들에게 말한다. “보스턴은 미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알린 곳이라 들었습니다. 마라톤 대회는 그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보스턴의 상징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미약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알리려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국기가 아닌 성조기가 달린 유니폼을 받았습니다. 그 유니폼을 입고 뛰라는 것이 여러분이 말하는 보스턴의 독립 정신이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려 승전보를 전하는 마라톤 정신이라면 저희는 이곳에 잘못 왔습니다.”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에서 가장 ‘영화 같은’ 장면이 시작되는 대목이다. 손기정은 이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뛴 아픔의 개인사를 호소력 있게 들려주며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다. 출전 여부를 놓고 손기정과 마찰을 빚었던 서윤복도 회견장에 등장해 유니폼을 반납한다.

추석 연휴 하루 전날인 오는 27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1945년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이라 국호의 정부가 세워지기도 전인 1947년 미군정 체제에서 조선 마라톤 대표단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KOREA’ 이름으로 국제 스포츠대회에 출전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과 대회 현장 및 결과를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상영시간(러닝타임)이 108분인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손기정 감독의 분투로 남승룡과 서윤복 선수가 극적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서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 장면이다. 종영을 30여분 남긴 시점부터 약 20분간 긴박감 있게 전개된다. 손 감독의 전략과 페이스 메이커로 나선 35세 노장 남승룡의 인도와 조절에 따라 레이스에 임하는 서윤복.

결정적 순간에 넘어지는 사고를 극복하고 마의 언덕인 '하트 브레이크'를 오를 때 어린 시절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무악재를 뛰어다니던 모습을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게 그럴싸하다. 우승하기 위해 힘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에 힘들었지만 그리운 시절이 떠올랐을 법하기 때문이다. 12위로 들어오는 남승룡을 기다렸다가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세 주역의 모습은 객석까지 훈훈한 온기를 전한다.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중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제작자(장원석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대표)의 말처럼 “해방 이후부터 정부 수립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극적인 감동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스크린에 옮겨놨다. 자칫 ‘애국 영화’나 ’국뽕‘으로 흐를 수 있는 내용이고 실제로 ’감정 과잉‘이 드러나는 대목도 있지만 ’명분보다는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는 서윤복과 미국 사업가 백남현(김상호)의 현실적인 대사와 행동이 균형을 맞춘다. 1947년 당시 시대상이나 보스턴 대회 모습도 그럴듯하게 재현한다.

세 주역을 연기한 배우들은 실존 인물을 흉내 내기보다는 자기 개성을 그대로 살려 연기한다. 실화라는 요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극 중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이중 실제로 달리는 장면이 많은 서윤복 역의 임시완이 마라토너의 몸을 만들기 위해 들인 노력이 스크린에 그대로 드러난다. 평가해 줄 만하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