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창덕궁에서 당신의 부고를 듣고 아내 이덕혜 씀
택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고.
욕심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결국 그렇게 살지 못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였겠죠.

봄기운이 완연하고 꽃이 만발했던 5월, 덕수궁에서 태어난 아기는 행복했습니다. 한때 대한 제국의 황제였던 아버지는 시종들에게 “웃고 있는 갓난애 얼굴을 좀 보아라, 괜찮으니 손을 만져 보거라.” 하셨다 해요.
그러다 1919년 겨울,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울음소리가 한동안 덕수궁을 가득 채웠어요. 그리고 몇 달 뒤 담장 밖에서 함성 소리와 만세 소리가 들렸어요. “아기씨, 나라를 찾기 위해 백성들이 들고일어났어요.” 상궁들이 했던 이 말이 아직 기억나요.

경성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때에서야 덕혜라는 이름을 얻었어요. 그전까지는 복년당 아지라고 불렸지요.
1925년 봄, 도쿄로 유학을 갔어요. 열세 살의 나이였죠.
오빠 이은과 일본인 언니 이방자랑 같이 살면서 학교에 다녔어요.
외톨이였어요. 학우들과 말하지 않았고 조용히 교실에 앉아만 있었으니까요.
운동회에서도 언제나 꼴찌로 달렸죠.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1929년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을 위해 바다를 건넜지만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음에도 급히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그때였을 거예요. 버텨왔던 신경줄이 끊어졌어요.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지요.
그것이 운명에 대한 내 나름의 반항이었나 봐요.
그러다 소 다케유키, 당신을 만났죠.
처음 보았을 때 키가 크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많이 놀랐을 거예요. 내게 이런 병이 있다는 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 테니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일본 황실의 권유로 조선 왕족과 결혼을 했는데 이런 부인을 만났으니.
당신이 쓴 글을 읽었어요.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당신이 안쓰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랑하는 딸 마사에가 태어났고 전쟁도 끝났어요.
귀족제가 폐지되었고 가계가 어려워졌죠. 당신도 일을 해야 했고요. 집에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난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죠.
우리 얘기가 신문에 실렸고 저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난이 당신에게 쏟아졌어요.
당신은 오빠와 상의를 했고 이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 뒤로 당신은 사람들의 어떤 오해에도 입을 닫았어요.
그것이 나와 내 모국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겠지요.
난 1962년이 되어서야 모국으로 돌아왔어요. 40년에 가까운 시간, 한국민들에게는 나도 대한 제국도 부끄러운 과거였을 거예요.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줄곧 살았어요. 병은 나아지지 않았지요.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이 날 찾아 서울로 왔었다고 들었어요.
우린 그날 만나지 못했죠.

그리운 아내여.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해궁의 회랑에도 아내여 들리는가.
흘릴 듯한 시선으로 생긋 웃음 지어 보이는 어린 아내여.


시대의 파도에 떠밀린 인생.
그 압도적인 힘에는 누구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자책하진 말기로 해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운명이었다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이죠.
그럼에도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1931년)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1931년) / 사진출처 = 위키백과
1985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당신의 부고를 듣고
아내 이덕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