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R&D에 돈 쏟아 붓더니…한미약품의 놀라운 반전 [안재광의 대기만성'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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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증시에서 시가총액 1위 기업은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 입니다. 원래 세계 최대 명품 회사 LVMH, 루이비통이 오랜 기간 1위였는데 노보 노디스크 주가가 올 들어 9월 초까지 40% 가량 오르면서 루이비통을 제쳤습니다. 시가총액이 약 43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570조원이나 합니다. 노보 노디스크는 요즘 갑자기 뜬 회사죠. 비만 치료제 '위고비'와 '삭센다'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특히 '위고비'는 요즘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일론 머스크도 '위고비'로 살을 뺐다고 털어놨죠. 사진만 보면 딴 사람 같아요.이 회사 매출의 약 90%가 비만 치료제에서 나오니까, 약 한두 개만 대박이 터져도 증시에서 1등 기업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대박 신약은 먼 나라 얘기 같지만, 한국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 2, 제 3의 노보 노디스크를 꿈꾸는 회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실제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고요. 만약에 한국에서 대박 신약을 개발한다면, 이 회사가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개발 중인 신약 후보만 30여개에 달하는 신약에 진심인 기업, 한미약품입니다. 한미약품은 중앙대 약대를 나온 임성기 회장이 1973년에 세운 회삽니다. 이 분이 창업 이전에 약국을 했는데요. 약국 이름이 본인 이름을 딴 '임성기약국'이었죠. 판매하는 약도 본인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서 주로 성병 치료제를 팔았다고 해요. 약국 할 때부터 사업 수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성병 환자가 약국에 들어오면 별도 공간에서 상담을 해주고, 또 약국 가는 것 조차 꺼림칙하게 여겼던 사람들 위해서 전화 주문도 받아줬습니다. 성병을 굉장히 창피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거든요. 이런 식으로 성병에 특화된 약국이란 입소문이 전국으로 나면서 임성기약국은 자리를 잡고 돈도 많이 법니다. 제약사를 설립 한 것도 약국의 성공 이후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이었어요. 남의 약만 팔 게 아니라, 내 약을 팔아보자 했던 겁니다. 첫 제품으로 내놓은 게 'TS산'이란 것이었는데요. 이게 복합 항생제인데 성병 뿐만 아니라 방광염, 기관지염 같은 질환에 많이 처방이 됐습니다. TS산을 개발 하자마자 엄청 팔려 나갔어요. 한미약품은 창업 5년 만인 1978년 매출 5억원을 넘겼고요. 지금 가치로 하면 40억원쯤 번 것이죠. 1986년에는 연구센터를 세웠고, 1988년에 상장도 했습니다.
임성기 회장은 사업 초기부터 남의 약이 아니라, 우리가 개발한 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출이 나오는 족족 연구개발에 우선 돈을 썼어요. 특히 최근 10년 간 연구개발비가 급격히 느는 게 보이시죠. 한미약품의 연구개발비는 2013년에 1000억원을 처음 넘겼고, 2019년에는 2000억원 이상 쓰기도 했습니다. 매출 1조원 안팎 하는 회사가 그 20% 가량을 연구비로 쓰는 것은 대단한 것이에요. 경영자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죠. 임성기 회장은 생전에 연구개발에 '집착'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단히 진심이었습니다. "연구개발은 나의 신앙이고, 목숨이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신약을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봐야겠죠. 그렇다고 한미약품이 존슨앤존슨, 화이자 같은 글로벌 제약사 처럼 약 하나 개발하는 데 수 천억원씩 돈을 쓸 수는 없었고요. 단계적으로 밟아 나갔습니다. 1단계로 제네릭, 그러니까 특허가 끝난 약을 빠르게 카피해서 만드는 전략으로 가고. 2단계로 개량 신약, 기존에 나온 약의 단점을 보완하거나 효능을 개선하는 식으로 개발하고. 3단계에서 비로소 세상에 없는 신약을 개발한다. 한미약품은 현재 기존 약을 카피하거나 개량해서 매출을 주로 내고요. 여기서 번 돈을 3단계인 신약 개발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미약품의 매출 상위 약을 보면 고지혈증 치료제 '로수젯', 복합고혈압 치료제 '아모잘탄', 역류성식도염 치료제 '에소메졸', 전립선비대증 치료제 '한미탐스', 발기부전 치료제 '팔팔정' 등인데요. 전부 제네릭이나 개량신약 입니다. 3단계 신약 개발에서도 돈은 법니다. 큰 성과를 10여년 전부터 내고 있어요. 신약을 어느 정도 까지만 개발한 뒤에 가능성이 보이면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팔고, 로열티를 받는 식으로 기술 수출, 라이선스 아웃을 한 겁니다.
2011년 '오라스커버리' 기술 수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무려 11건의 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했습니다. 특히 2015년에는 총 계약 금액이 8조원에 이르는 다섯 건의 기술 수출을 성공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되죠. 이 기술을 가져간 제약사들이 임상 3상에 성공해 판매까지 하면, 한미약품은 계약금 이외에 기술료와 로열티까지 받게 되는데요. 여기서 반전은, 아니 우려했던 점은 중도에 계약이 틀어지거나 기술을 포기하는 것인데요. 그 일이 일어납니다. 한미약품 신약 기술을 가져간 제약사들이 줄줄이 권리를 반환하죠. 특히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가 가져간 기술인 지속형 인슐린, 그리고 당뇨병 치료제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실패가 뼈 아펐습니다. 계약 금액이 39억유로, 5조5000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고요. 또 상업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많이들 봤거든요. 여기에 더해 베링거인겔하임이 폐암 치료제 '올무니팁'의 임상 3상을 중단하고 한미약품과 계약 해지를 하면서 충격을 줬습니다. 이 내용을 알리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는데요. 베링거인겔하임과 계약 해지 사실을 알리기 직전에 1조원 규모의 표적 항암제 기술 수출 내용을 공시한 겁니다. 큰 악재를 호재성 공시로 물타기 해서 덮으려 했다, 이런 의심을 받았어요. 실제로 이 일로 한미약품은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을 여러번 거치면서, 한미약품이 그동안 기술 수출을 했던 것, 그리고 연구개발 하느라 돈 쏟아 부은 것에 회의적인 시각도 커졌어요. 주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요. 기술 수출 기대감이 한창이었던 2015년 말에 70만원을 넘겼던 주가가 현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30만원 아래에 있거든요. 그 많았던 기술 수출이 제대로 상업화가 된 게 드무니까 당연히 그럴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안 된것은 아니죠. 2012년 스펙트럼이 사 간 호중구 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 미국에선 '롤베돈'으로 불리는데요. 이게 계약 10여년 만인 2022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 FDA의 허가를 받고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겁니다. 호중구 감소증은 주로 암 환자가 항암제 치료를 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부작용입니다. 체내 호중구가 감소하면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서 다른 질병에 취약해 지거든요. 이걸 개선하는 약이에요. 현재 이 시장은 암젠의 '뉴라스타'가 장악하고 있는데, 롤론티스는 약효 시간이 뉴라스타에 비해 더 길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약이 올 1분기에만 1560만달러, 약 200억원 어치가 팔렸고요. 스펙트럼은 올해 연간 9700만달러, 내년 1억9000만달러, 2025년 2억6100만달러로 판매액이 크게 늘 것으로 보고 있어요. 한미약품이 매출의 5%를 로열티로 받는다고 가정할 때, 앞으로 10년 간 약 1000억원 가량이 유입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것보다 더 크게 기대하는 게 있죠. 비알콜성지방간염, NASH 치료제 개발입니다. 현재 미국의 MSD, 머크라고도 불리죠. 이 머크가 한미약품 기술을 받아서 개발중인 '에피노페그듀타이드'의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NASH는 술을 안 마신 사람 조차 간에 지방이 쌓여 염증이 생기는 질환인데요. 세계적으로 환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제가 없어서 신약만 개발이 되면 잭팟이란 말이 나오고 있어요. 지금까지 나온 임상 결과는 굉장히 좋았는데요. 상업화 하기 까진 앞으로 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세계 제약 판도를 바꿀 만큼 엄청난 파장이 있을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신약 후보 물질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원래는 한미약품이 얀센에 2015년 기술 수출을 했던 것이고, 타깃도 NASH가 아니라 비만, 당뇨 치료제 개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얀센이 2019년 계약을 중도에 해지하는 바람에 한미약품이 다시 이 기술을 활용할 회사를 찾다가 나타난 게 머크 입니다. 한미약품은 머크와 총 8억7000만달러, 약 1조1000억원에 계약해서 우선 1000만달러 계약금 받았고요. 상용화에 성공하면 나머지 금액도 순차적으로 받게 됩니다. 이런 게 하나 더 있어요. 아까 사노피가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하려고 하다가 포기한 '에페글레나타이드' 입니다. 한미약품은 사노피가 진행한 임상 3상 결과에서 비만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현재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있는데요. 당뇨병 임상 3상에선 5% 수준의 체중 감소 효과를 보였다고 해요. 그런데 이 땐 비만 치료제 목적이 아니었어서 식단과 운동을 철저하게 통제한 다른 비만 약과는 달랐어요. 전문가들은 비만 치료제 목적으로 임상을 다시 진행한다면, 체중 감소효과가 5% 보다는 훨씬 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비만 치료제 시장은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가 장악하고 있는데, 수요는 너무 많고 약의 공급은 적어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일제히 뛰어 든 영역이죠. 특히 릴리가 FDA 허가 신청을 한 '마운자로'의 경우 20% 이상의 체중 감소 효과가 있어서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를 뛰어 넘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맞서 노보 노디스크는 주사제인 위고비를 먹는 약 형태로 바꿔서 출시하려고 합니다. 주사로 맞는 것보다는 먹는 약이 훨씬 부담이 덜해서 판매가 잘 될 테니까요. 내년 쯤에는 나올 것으로 업계에선 예상을 하고 있어요. 또 암젠, 화이자 같은 큰 회사들도 개발중이라 몇 년 지나면 비만 치료제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만 치료제 시장이 세계적으로 급성장 하고 있어서 개발만 가능하다면, 매출은 많이 나올수 있어요. 비만 치료제 시장은 지난해 약 3억달러에서 올해 6억달러로 두 배 가량 성장할 전망이고, 2028년에는 27억달러 약 3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단 1%만 점유해도 3000억원 이상 매출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실 제약 업계에선 신약 개발이 중간에 무산되거나, 애초 목표로 했던 치료제가 아니라 다른 치료제로 바뀌는 게 굉장히 흔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런 기술 수출이 과거에 많지 않았다보니 한미약품이 마치 '양치기 소년'으로 몰려서 욕을 먹기도 했어요. 실패가 많기 때문에 연구개발을 많이 해서 신약 파이프라인을 많이 갖춰 놓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현재 한미약품의 신약 파이프라인이 30여개에 이르는데요, 앞으로도 기술 수출과 연구 중단이 있을수 있지만 계속 도전하길 바랍니다. 노보 노디스크 같은 글로벌 제약사가 한국에도 하나 쯤 있어야죠. 신약 개발 맛집 한미약품, 새로운 대박 신약 내놓을 때까지 눈여겨 보겠어.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