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올해 국내 공연계는 셰익스피어 붐이다. ‘왜 갑자기 또 셰익스피어?’라며 의아했다.

‘오늘 밤도 셰익스피어는 공연된다’ 라는 말처럼 셰익스피어 작품이야 일 년 열두 달 언제든, 또 전 세계 어디에서든 관객과 만나고 있지만,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차례차례 공연 되는 건 이례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는 2014년, 타계 400주년을 기념하는 2016년에도 이처럼 셰익스피어 대표작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땐 분명히 이유가 있던 해였다.

올해 상반기부터 지금까지 공연 된 작품들을 보자. 먼저 올 봄 포문을 연 작품은 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4월)였다. 곧 이어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작으로 배우 박호산 주연의 ‘오셀로’(5~6월)가 무대에 올랐고, LG아트센터에는 올해 88세 이순재 배우의 마지막 리어를 내세우며 ‘리어왕’(6월)을 선보였다.

위의 세 작품이 대극장 무대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정통극이었다면, 산울림 소극장에서는 스니커즈를 신은 4명의 햄릿이 등장하는 현대적 각색으로 ‘플레이 위드 햄릿’(6~7월)이 공연됐다. 이렇게 4대 비극이 모두 공연된 데 이어, 국립창극단은 창극단 최초로 셰익스피어 작품을 각색한 ‘베니스의 상인들’(6월)을 공연해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연극은 물론 오페라, 창극까지 그 형식을 넘나드는 셰익스피어 성찬이 차려진 것이다.
국립창극단
국립창극단
‘2023년 왜 지금 다시 셰익스피어?’라는 질문이 다시금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진부한 말이지만 셰익스피어가 ‘고전’인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올해 많은 작품들이 공연 된 이유로는 어쩐지 설명이 부족하다.

가장 먼저 연관성 있는 알리바이로는 올해가 셰익스피어 전집 ‘퍼스트 폴리오(First Folio)’ 발간 400주년이라는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 한번 해 본적이 있을텐데,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그 많은 작품들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는거지?’ 라고 말이다. 퍼스트 폴리오가 바로 그 비밀이다.
셰익스피어 사후 7년 후인 1623년에 셰익스피어의 절친한 두 친구 헨델과 콘웰이 발간된 희곡 전집 퍼스트 폴리오는 원래 <윌리엄 셰익스피어씨의 희극, 역사극, 비극(Mr. William Shakespeare‘s Comedies, Histories, and Tragedies)>이라는 긴 이름의 책이었다. 헨델과 콘웰이 없었다면 셰익스피어 작품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공이 크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다른 배경이 더 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임스 1세로 왕권이 바뀌던 시기에 완성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사우샘프턴 백작이 반란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는 등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36살의 셰익스피어는 비극의 시대를 열게 된다. 작가로서, 또 중년에 접어든 인간으로서 성숙기에 접어든 결과물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격변하는 시기에 놓인 자신의 처지 속에서 작품의 영감이 다양하게 떠올랐을 수도 있다.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다행히 제임스 1세도 연극을 좋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셰익스피어가 속한 극단을 ‘국왕 극단’으로 승격했고, 1604년 윈체스터 주교의 궁전에서 열린 제임스 1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할 정도였다. 하지만 연극의 전성시대는 길지 않았다. 제임스 1세 이후 즉위한 찰스 1세때 청교도혁명이 발발해 극장문화는 탄압당했다. 곧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배경을 연결해 보면, 보통 주요 극장과 단체들이 공연을 올리기 1년 전 쯤에 작품을 선정을 한다는 점에서 정권교체가 있었던 작년이 공교롭게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 올해 비슷한 시기에 공연 된 것은 시대의 불안이 우리사회에 스며있음을 감지하게 하는 바로미터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한다.

셰익스피어 비극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본능과 격정, 유한한 삶 속에서 꿈틀대는 욕망과 두려움은 우리의 불안을 더욱 자극한다. 삼촌과 어머니의 계략으로 살해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햄릿의 불안, 부하 이아고에게 속아 아내에 대한 질투로 불안에 떨다가 자신과 아내의 목숨을 끊는 오셀로, 딸들의 사랑을 측정하려다가 버림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 리어왕, 그리고 왕좌에 오르려는 욕망 속에서 살인과 탐욕을 행하다가 자살을 택하는 맥베스까지, 이 모든 인물들의 저 깊은 곳에는 불안이 관통한다. 파스빈더 감독 작품 제목처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불안이라는 인간의 가장 연약한 감정을 가장 능숙하게 다뤘다는 점이 지금도 그의 주인공들을 무대에 계속 오르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