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과학입국과 老교수에 대한 예의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잠깐의 침묵 뒤로 이어진 긴 한숨. 논문 인용지수 세계 상위 1% 석학인 A교수가 물었다. “왜 그런 거라고 하나요? 설명을 들으셨나요?”

A교수는 한국인 최초 노벨 과학상 수상자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세기 이후 발전이 정체됐던 특정 분야를 돌파해 냈다. 세계에서 후속 논문이 뒤이어 터졌다. 그의 논문을 응용한 혁신은 2차전지, 디스플레이, 우주·항공 등 다양한 산업에서 지금도 벌어진다. 현재 20여 명의 석·박사급 제자들과 차세대 반도체 소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리더연구’ 과제 지원을 받은 덕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6년 10월 과학기술처를 설립하며 쓴 ‘과학입국 기술자립’ 친필 휘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6년 10월 과학기술처를 설립하며 쓴 ‘과학입국 기술자립’ 친필 휘호.
전국 95개 리더연구는 정부의 개인 연구개발(R&D) 대표사업이다. 리더연구 과제마다 연간 7억6070만원씩 9년간 지원이 이뤄진다. 이 중 약 3억원이 석·박사 연구자 인건비다. 나머지는 장비 구입비와 실험 재료비, 시설 운영비 등이다. A교수는 내년 연구비가 설명도 없이 갑자기 30%나 삭감된 것에 혼란스러워했다.

과기정통부가 국회에 제출한 9128쪽, 8권 분량의 ‘2024년도 예산안 및 설명자료’를 구해 살펴봤다. 내년 리더연구 과제비는 5억3770만원이다. 2억2300만원의 삭감이 이뤄졌다. A교수는 실험실에 있는 조교 절반 이상을 내보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제자들이 떠나면 교수의 연구는 이어질 수 없다. 전국 리더연구실에 있는 수백 명의 고급 인재가 해외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이미 이공계 박사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에서는 해외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알아본다는 글이 이어진다.

정부가 설명 못 한 R&D 예산 삭감은 또 있다. 집단 R&D 대표 사업인 ‘선도연구센터’다. 분야별로 특화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센터마다 연간 최대 20억원씩 총 7년간 지원한다. 전국 대학교 등에 159개 센터가 있다. 그러나 내년 사업명이 ‘글로벌 선도연구센터’로 바뀌고 센터당 연구비는 올해 대비 20%, 3억8860만원(공학 기준) 줄었다.

선도연구센터는 벤처기업의 산실이다. 한국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개발한 KAIST 인공위성센터가 1990년대 이 사업을 통해 위성 제작 기술을 체화했다. 센터 연구진이 모여 창업한 회사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인공위성 수출기업 쎄트렉아이다. 유전자 백신 원천기술을 대형 제약사에 이전하고 있는 제넥신은 포스텍 융합생명공학부가 사업 지원을 받아 발전한 기업이다. 바이오기업 셀리드는 가톨릭대 류머티즘 선도연구센터에서, 마크로젠은 서울대 암 선도연구센터에서 시작했다.

물론 대다수 과학자도 R&D 예산 배분이 갖고 있는 문제에는 공감한다. 과거 국민의 혈세를 눈먼 돈으로 취급하며 용도에 맞지 않게 쓰던, 일부 비양심적인 연구자들이 수사기관에 적발된 바 있다. 영세 중소기업은 브로커 역할을 하는 연구기획·과제관리업체와 결탁하기도 했다. 지난 5년간 정부 R&D 예산이 연평균 10.9%씩 증가하는 과정에서 비효율이 커졌다. 이를 정밀하게 걷어내는 작업도 필요하다. 올해 세수 결손이 60조원이나 발생해 과학계도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예산을 조정하는 것은 디테일이 생명이다. 기획재정부는 “구체적인 목표 없이 소규모 나눠 먹기식 사업이 난립하던 것을 대폭 정리했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는 “우수한 연구에 자원을 집중하는 수월성 강화 방향”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앞서 살폈듯 리더연구와 선도연구센터 사업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수행되는 수월성 중심의 개인·집단 R&D 사업이다. 과제를 받기 위해선 16.8 대 1(2019년 리더연구 기준)의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하기에 나눠 먹기식 연구라고도 볼 수 없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과학계를 향해 “나눠주기, 유사 중복 등의 카르텔적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 사례를 묻는 말이 이어졌지만 명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오죽 답답하면 국민의힘 소속 장제원 과방위원장까지 나서 “국민들도 도대체 어떤 게 나눠주기고 어떤 게 유사 중복인지 모른다. 국회에 올 때는 사례를 들어서 설명할 준비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예산안이 연말 국회를 통과하기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이제부터라도 옥석을 제대로 가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연구비가 제대로 쓰이는지, 그렇지 않다면 원인과 대책이 각각 무엇인지 차분하게 분석하고 실행해야 한다. R&D 예산을 최종 삭감하는 것은 다음의 일이며, 이 모든 과정은 마치 곪은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 수술처럼 정밀하게 이뤄져야 할 테다. 그게 지난 세월 ‘과학입국 기술자립(科學立國 技術自立)’을 위해 힘써온 과학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백발이 성성한 A교수는 오늘도 묵묵히 실험실을 지키며 답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