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결혼할래 죽을래"…'스토커 그녀' 저지른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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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국민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
가족의 죽음, 실패한 사랑들
그 고통과 극복의 이야기
에드바르 뭉크(1863~1944)
가족의 죽음, 실패한 사랑들
그 고통과 극복의 이야기
![흡혈귀(1895).](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217.1.jpg)
그녀와 남자는 한때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사랑은 집착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친구들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 뒤 이를 이용해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환히 들여다봤습니다. 남자가 다른 도시로 도망가면 그녀는 곧바로 뒤를 따랐고, “따라오지 말라, 네가 싫다”고 하자 남자의 숙소가 있는 곳의 옆 마을에 묵으며 “보고 싶다, 결혼하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변에는 “남자가 나를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남자는 애써 그녀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남자의 호텔방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불쾌함도 잠시. “그녀가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어요. 상태가 안 좋아요. 당신이 보러 가야 해요.”
아무리 스토커라도 한때 사랑했던 사이. 남자는 한달음에 그녀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멀쩡했습니다. 총을 든 채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랑 결혼해.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애원, 설득, 분노, 말다툼….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울려 퍼진 총성. 곧이어 남자는 자기 왼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총에 맞아 박살 난 왼손 중지를 보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절규(1893)](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5.1.jpg)
죽음, 죽음, 죽음
![담배를 든 자화상(1895).](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64.1.jpg)
다행히도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뭉크는 살아남았고, 몸은 약하지만 똑똑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예술에 대한 재능도 출중해서 7살 때 바닥에 그린 낙서로 가족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가난이었습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 노르웨이에서 의사는 하층민에 가까운 직업이었습니다. 늘 병에 걸렸거나 다친 사람을 봐야 해서 감염 위험이 높은 데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환자를 치료할 수단이 별로 없어서 자주 돌팔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악한 생활 환경은 어머니의 결핵을 더욱 빠르게 악화시켰습니다.
![칼 요한 거리의 저녁(1892). /베르겐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37.1.jpg)
뭉크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이상해졌습니다. ‘아내가 죽은 건 내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아버지는 종교에 광신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잘못을 저지르면 “천국에 계신 어머니가 실망하고 계신다”며 호되게 때렸습니다.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지만, 명백한 학대였습니다.
![죽은 어머니와 아이(1897~1899)](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46.1.jpg)
!['어린 시절의 기억-문 밖에서'(1892). 뭉크가 다섯 살때, 어머니는 뭉크를 데리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산책을 나섰다. 뭉크는 회고한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248.1.jpg)
가난하고 우울했던 어린 시절, 뭉크의 유일한 버팀목은 한 살 터울의 누나였습니다. 그는 누나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누나를 어머니처럼 따르고 사랑했습니다. 누나도 뭉크를 아껴 줬습니다. 하지만 누나마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은 뭉크의 영혼에 또 한 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습니다. 한편 뭉크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기도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술과 기도는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침(1884)](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7.1.jpg)
뭉크 자신조차 화가가 되기로 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무렵 그의 일기장에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 줄 썼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신 설득했습니다. “뭉크의 재능이라면 화가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덕분에 뭉크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오슬로 미술공예학교에 진학했고, 금세 재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뭉크의 그림 실력이 느는 데 비례해 그의 술도 늘어만 갔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겹쳐 뭉크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이를 달래기 위해 뭉크는 허구한 날 사고뭉치 친구들과 어울려 아침부터 밤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그럴수록 아버지와의 갈등은 심해졌습니다.
![병든 아이(1885~1896).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8.1.jpg)
그럼에도 그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덕분에 뭉크는 스물 여섯살 때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파리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날, 온 가족은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식사를 했습니다. 못마땅해하는 듯한 표정의 아버지 때문에 식사 분위기는 어두웠습니다. 정적 속에서 이따금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아버지와 뭉크의 대화는 이게 전부였습니다. “파리는 날씨가 습하다니까 건강 조심해라.” “네.”
![사춘기(1894~1895). 뭉크는 사춘기의 공포라는 소재를 다룬 역사상 최초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소재 뿐 아니라 여성의 누드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그는 선구자였다. 성적으로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그림자가 덧없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고려하면 단순하게 해석할 수만은 없다. 앞서간 만큼 그의 작품은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종교적 엄숙주의에 빠져있는 그의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그랬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249.1.jpg)
오랜 기다림 끝에 증기선은 마침내 굉음을 내뿜으며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승객들처럼 뭉크도 갑판 위에 서서, 마중 나온 몇 안 되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뭉크는 이상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항구 구석에 놓인 두 개의 기다란 화물 컨테이너 사이, 짙은 그늘 속에서 그는 구부정한 모습의 한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가난과 절망, 그리고 반전
!['여름 밤의 꿈'(1893)](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0.1.jpg)
급하게 돈을 빌려 집에 부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뭉크의 그림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몸은 매일같이 아팠고, 알코올 중독도 여전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뭉크는 언제나 배고픔과 외로움과 추위에 시달렸습니다. 숙소 침대 커버에 물감을 흘렸지만 물어낼 돈이 없어서, 그 위에 물감으로 원래 커버 무늬를 덧그린 뒤 도망치듯 숙소를 옮긴 적도 있었습니다. 절규를 그리기 전 완성한 유사한 작품 ‘절망’(1892)이 이때 무렵 그린 작품입니다. 길 한가운데서 인파의 흐름을 거스르며 등을 돌린 채 걷고 있는 인물이 바로 뭉크입니다.
![절망(1892). /뭉크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34.1.jpg)
이런 와중에도 뭉크는 붓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끈기 덕분일 겁니다. 반전의 계기는 1892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뭉크의 개인전. 베를린 언론들은 처음 보는 우울하고 기괴한 화풍의 그림에 맹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저런 전시는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불과 개막 1주일 만에 전시는 강제로 중단됐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명성을 쏘아 올리는 방아쇠 역할을 했습니다. 뭉크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고, 그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젊은 베를린 예술가들 사이에서 뭉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겁니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독일에서 뭉크의 평가는 계속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뭉크는 독일 현대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세 명의 여인
![이별 (1896)](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2.1.jpg)
불륜을 저지른 뭉크는 죄책감에 빠졌습니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잿더미로 변해 바닥에 깔리는 걸 느꼈다.” 탈로는 뭉크를 조금 가지고 놀다 버리고는 다른 남자를 찾아갔습니다. 성(性)과 우울, 후회, 두려움을 연관시키는 뭉크 특유의 정서가 이때 확립됐습니다.
![재(1894)](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47.1.jpg)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엘의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워대는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유엘이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증거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남편이 내연녀와 결혼하기 위해 유엘을 죽였다”고 수군댔습니다. 뭉크의 영혼에 또 하나의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마돈나(1895)](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3.1.jpg)
![마라의 죽음(1907). /뭉크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35.1.jpg)
죽음과 함께한 삶
뭉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별개로, 그는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으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던 끈기가 드디어 빛을 본 겁니다. 40대에 접어든 뭉크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5년 동안 유럽에서 전시를 43번이나 열었습니다. 돈도 모였습니다. 특히 유럽의 부자들이 앞다퉈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뭉크는 아이들의 그림을 특히 잘 그렸습니다.![린데 박사의 네 아들(1903)](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51.1.jpg)
말년의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독신으로 반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여러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자이자 유명 인사가 된 그에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돈을 구걸했습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를 누군가 총으로 쏴 죽인 일도 있었고, 철없는 젊은이들이 밤낮없이 그를 찾아와 만나달라고 하고 전화를 거는 등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에게 아무것도 해준 적 없는 노르웨이는 세무서를 통해 끊임없이 돈을 뜯어 갔습니다. 시력은 약해졌습니다. 자신을 가장 먼저 알아봐 줬던 독일에서 자기 작품이 ‘퇴폐 미술’로 낙인찍히는 일도 겪어야 했습니다. 나치의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뭉크는 그저 묵묵히 혼자 그림을 그렸습니다. 돈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관심 있는 건 단 하나, ‘영혼의 일기장’이자 ‘자식’인 그림을 이 세상에 남기는 것뿐이었습니다. 가구가 거의 없는 그의 저택에는 수백장에 달하는 그림이 쌓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그가 81세까지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내면의 평온 덕분이었을 겁니다.
![창가에서(1940). 왼쪽 화가의 삶과 오른쪽 죽음을 암시하는 겨울 풍경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뭉크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038.1.jpg)
어떻게 보면 뭉크의 삶은 실패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뭉크는 결코 삶을, 그림을 놓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면서도, 자신의 깊은 내면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 이미지들을 건져 올려 화폭에 표현했습니다. 언제나 그의 삶에는 죽음이 함께 했고 마침내 그 자신도 죽음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결코 그 앞에서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의 일기장’은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승리의 기록으로 미술사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태양(1911~1916).](https://img.hankyung.com/photo/202309/01.34528108.1.jpg)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은 출간 준비를 위해 다음주(23일) 한 주 쉽니다. 2주 뒤 더욱 좋은 글과 그림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