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달콤한 만큼 높은 '고향의 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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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 백년 여행기'
'멕시코 이주 노동자' 뿌리 찾아
코로나에도 세 차례 현지 방문
한인 이민 2~5세 이야기 담아
단 다섯 점이지만 서사는 충분
이주 한인 삶, 어둡지 않게 풀어
설탕으로 만든 농기구가 채워진
12m 벽…'디아스포라' 근원 표현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 백년 여행기'
'멕시코 이주 노동자' 뿌리 찾아
코로나에도 세 차례 현지 방문
한인 이민 2~5세 이야기 담아
단 다섯 점이지만 서사는 충분
이주 한인 삶, 어둡지 않게 풀어
설탕으로 만든 농기구가 채워진
12m 벽…'디아스포라' 근원 표현
비행기로 15시간은 족히 걸리는 머나먼 나라 멕시코. 그중 북서쪽 유카탄주의 주도 메리다에는 ‘엘 제물포’ 거리가 있다. 스페인어로 정관사 ‘the’를 뜻하는 ‘엘(El)’과 인천의 옛 이름 ‘제물포’를 합한 것이다. 이곳에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궁금증에 휩싸인다. 도대체 왜 이 먼 나라에 제물포 거리가 있을까.
정연두 작가(54)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지난해부터 멕시코를 세 번 방문해 그 배경을 탐구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 메리다로 넘어간 한인들이 모여 지내던 곳이란 답을 알아냈지만,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왜 멕시코로 향했을까. 이들은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후대는 지금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에 정 작가가 택한 건 ‘멕시코 한인’이었다. 제주도에 머물며 우연히 알게 된 백년초 설화가 계기가 됐다. “백년초에는 멕시코와 관련된 설화가 있어요. 멕시코의 노팔 선인장이 난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에 뿌리를 내렸고, 그게 조선에 백년초로 알려졌다는 거죠. 식물이 뿌리째 뽑혀 낯선 공간에 ‘이식’된 것이 문득 우리 조상들이 조선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주로 ‘이주’한 것과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그는 직접 멕시코로 향했다. 워낙 멀고 코로나19로 인해 쉽게 오고 갈 수 없는 상황이라 한 번 갈 때마다 몇 주씩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탐사했다. 정 작가는 “당시 40도가 넘는 기온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던 한인들의 피와 땀을 찾기 위해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을 방문하고, 한인 이민 2~5세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정 작가의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시는 ‘디아스포라’라는 한없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어둡지 않게 풀어낸다. 스페인어와 멕시코의 이국적인 전통 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한인의 역사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정 작가는 이를 통해 옛 조상들이 낯선 땅에서 느꼈을 생경함과 낯섦의 감각을 관람객들이 직접 느끼도록 했다.
이런 정 작가의 강점은 마지막 전시에서 특히 빛난다. 제목은 ‘날의 벽’(2023).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상징인 ‘통곡의 벽’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높이만 12m에 달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눈길을 끄는 건 재료다. 설탕으로 만든 농기구가 거대한 전시장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는 “설탕은 달콤하고 반짝이지만 그 뒤에는 설탕과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역사가 담겨 있다”며 “어린 시절 ‘뽑기’를 연상시키는 유희적 재료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근본적 원인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5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정연두 작가(54)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지난해부터 멕시코를 세 번 방문해 그 배경을 탐구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 메리다로 넘어간 한인들이 모여 지내던 곳이란 답을 알아냈지만,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왜 멕시코로 향했을까. 이들은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후대는 지금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백년초에서 시작된 100년 전 이야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는 그 결과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현대자동차가 2014년부터 중진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정 작가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현대차 시리즈의 주인공이 됐다. 그가 꾸준히 탐구해온 주제인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민족) 덕이었다. 그는 2014년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한인들의 역사를 탐구해왔다. 2015년엔 프랑스 이주민을, 지난해엔 하와이로 간 조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파헤쳤다.이번에 정 작가가 택한 건 ‘멕시코 한인’이었다. 제주도에 머물며 우연히 알게 된 백년초 설화가 계기가 됐다. “백년초에는 멕시코와 관련된 설화가 있어요. 멕시코의 노팔 선인장이 난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에 뿌리를 내렸고, 그게 조선에 백년초로 알려졌다는 거죠. 식물이 뿌리째 뽑혀 낯선 공간에 ‘이식’된 것이 문득 우리 조상들이 조선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주로 ‘이주’한 것과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그는 직접 멕시코로 향했다. 워낙 멀고 코로나19로 인해 쉽게 오고 갈 수 없는 상황이라 한 번 갈 때마다 몇 주씩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탐사했다. 정 작가는 “당시 40도가 넘는 기온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던 한인들의 피와 땀을 찾기 위해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을 방문하고, 한인 이민 2~5세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무겁지만, 어둡지 않은 역사
정 작가는 이 거대한 서사를 단 다섯 점의 작품으로 나타냈다. 작품 수는 적지만 하나하나가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대표작인 ‘백년 여행기’(2023)가 그렇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세 개의 스크린을 통해 한국의 판소리, 일본의 기다유, 멕시코의 마리아치 등 각국의 전통음악이 순차적으로 나온다. 그 음악에 맞춰 가운데 가장 큰 스크린에선 황성신문을 읽고 막대한 부를 꿈꾸며 배에 올라탄 사람들, 임신한 아내가 배에서 발을 헛디딜까 걱정하는 남편, 낯선 땅에 도착한 뒤 눈이 휘둥그레진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흘러나온다.정 작가의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시는 ‘디아스포라’라는 한없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어둡지 않게 풀어낸다. 스페인어와 멕시코의 이국적인 전통 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한인의 역사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정 작가는 이를 통해 옛 조상들이 낯선 땅에서 느꼈을 생경함과 낯섦의 감각을 관람객들이 직접 느끼도록 했다.
이런 정 작가의 강점은 마지막 전시에서 특히 빛난다. 제목은 ‘날의 벽’(2023).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상징인 ‘통곡의 벽’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높이만 12m에 달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눈길을 끄는 건 재료다. 설탕으로 만든 농기구가 거대한 전시장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는 “설탕은 달콤하고 반짝이지만 그 뒤에는 설탕과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역사가 담겨 있다”며 “어린 시절 ‘뽑기’를 연상시키는 유희적 재료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근본적 원인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5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