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 즉 ‘시각’의 상징성을 중심에 놓은 극은 ‘앎’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낳는다. 가장 좋은 예로, ‘실명’의 모티프를 사용한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왕>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눈’은 절대 진리인 이데아를 바라보는 지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의 인간중심적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래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초빙한 ‘앞을 보지 못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진리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번역된다.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의 의미심장한 예언을 무시하고 매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테이레시아스의 ‘보지 못하는 눈’은 신이 부여한 것이었고, 오이디푸스는 이를 몰랐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 자신임을 깨닫고 끝내 자신의 눈을 찔러 ‘보지 못하는 눈’으로 만든다. 오이디푸스의 원래 생각대로라면, 스스로 지식의 근원을 거세하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새로운 인식의 차원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지식’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었나?
(주)뉴프로덕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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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 사이의 갈등이 단순하지 않은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 둘의 갈등은 물론 한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의 양상과 결합되어 있다. 까를로스는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모범생이며, '인싸(인사이더) 중의 인싸'다. 그는 돈 파블로의 대리인이자 부인인 도냐 페피따의 절대 신뢰를 받으며 동시에 학생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는 존재다. 맹인학교에서 유일하게 ‘앞을 보는’ 사람인 도냐 페피따의 신뢰는 까를로스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신입생 이그나시오의 갑작스런 등장은 까를로스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질서에 균열을 낸다. 돈 파블로 맹인학교가 내세우는 ‘철의 정신’을 회의하고 질문하는 이그나시오의 이야기에 모두가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면서 학생들은 점차 이그나시오 주변에 모이고 이그나시오를 찾기 시작한다. 이그나시오는 이제 까를로스의 자리를 차지한다. 도냐 페피따의 인정과 신뢰 없이, 권력이 이동한 것이다.

그동안 학교는 학생들을 그저 ‘앞을 못 보는’ 평범한 존재라는 표현으로 순화시키고 그 안에 ‘철의 정신’을 심어왔다. 이 정신에 따라 맹인학교 학생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학교 밖 사람들과 동등하다는 강한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학생들은 지팡이에 의존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즐겼으며, 까를로스는 심지어 학교 밖 상황과 사람들을 겁내지 않는 진취적인 기상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그나시오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그나시오가 아는 것은 장님은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굴복되고 무시되는 존재라는 점, 그래서 장님-자신에게는 고통과 슬픔을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철의 정신’은 장님에게 몽상과 환상을 심어주는 거짓과 환멸의 정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그나시오에게는 앞을 ‘보기 원한다’는 단 하나의 욕망만 있다. 이 욕망은 자신이 어둠 속에 갇힌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끝없이 타오른다. 그에게 지팡이는 어둠 속에서 감각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다. 감각을 확장해서 사물과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인지하려는 정직한 도구다. 이러한 생각에 동조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갑자기 학교의 익숙한 지리 감각을 잃는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도 사라진다.
빛을 갈구했던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이그나시오와 학생들이 모두 지팡이를 들고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등장하는 장면은, 그들이 모두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시력을 갈구하는 몸짓을 일사분란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대열에서 까를로스는 소외되어 있다. 까를로스에게 지팡이는 용기와 믿음이 부족한 상태, 의존적인 상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까를로스는 빛을 보기 원하는 이그나시오의 생각을 깨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태로 삶의 의미를 구축해왔던 그동안의 노력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 안의 지리와 사람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그 질서 안에서 사는 건 그에게 행복이었다. 그 이상의 것은 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빛과 어둠, 앎과 무지에 대한 논쟁 끝에 이그나시오는 ‘빛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을 찾다 죽는다.
(주)뉴프로덕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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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까를로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그나시오의 죽음은 그가 모순과 허위를 ‘인지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그나시오를 따르던 학생들의 무감각한 동정과, 이그나시오를 제거하라는 자신의 사주를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도냐 페피따의 허위는 순간적으로 까를로스의 믿음을 토대부터 무너트린다. 이그나시오의 죽음이 실족사인지 자살인지 혹은 까를로스의 살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이 모순적 상황을 인지하도록 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처럼 별빛을 향해 발을 내딛고, 그의 눈은 비로소 어둠을 벗어난다. 그리고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처럼 죽는다. 그는 아마 질문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믿었던 것은 나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

‘빛’을 찾아 나선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의 죽음은 삶의 허위와 모순을 발견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그 ‘앎’은 환희가 아닌 비극이며, 이는 허위와 모순의 발견 이후 삶은 언제나 고통 속에 던져진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그들의 갈등은 ‘보지 못하여’ 서로 어긋난 시선 속에 있다 할지라도 날카롭고, 논쟁의 언어는 보편적인 지점들을 건드리며 울림을 만든다. 뮤지컬로 성실하게 재탄생된 그들이 반가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