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내 취향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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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당신이 무얼 먹었는지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는 말이 있었나. 하지만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책이야말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려준다고 여긴다. 그래서 인생 책, 인생 영화를 물어보는 질문이 너무나도 진부하다는 말이 너무나도 슬펐다. 그걸 안 물어보고 우린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나요? 거기서부터 뻗어나올 이야기가 얼마나 무궁무진한데.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어깨가 긴장된다. 기억하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그 책에 다른 책을 겹칠 준비로. 하지만 문학 이야기는 즐거운 동시에 무척 괴롭고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때로 그것은 그저 추천에 그치지 않고 투쟁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연약하니까.
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편집자로 일하다보면 서로 다른 취향끼리 격돌하는 순간을 자주 맞이한다. 내 취향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는 작품을 남에게 설득해야 하는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내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투사의 태도로 임하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꺾일 때 가장 많이 배우기도 했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장정일·한영인, 안온북스)를 읽었을 때 그 진리를 새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도서 없이 ‘오로지 본문만 읽는다’, 줄여서 ‘오본’이라는 독서모임을 시작한 장정일 작가와 한영인 평론가는 문학 이야기를 메일로까지 이어간다. 그리고 그 “혼자 보는 게 아까울 정도였”던 편지들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이다.
첫 편지에서 자본 앞에서 한없이 격하되는 노동의 현실을 절박하게 환기하는 소설 <9번의 일>(김혜진, 한겨레출판)을 장정일이 추천하고, 이에 한영인이 이 소설이 일반적인 노동소설의 문법을 탈피하면서도 숙명적인 부정성과 패배주의적인 세계관이 다소 짙다는 지적을 했을 때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 편지에서 장정일이 소설의 그 니힐리즘적 관점은 주인공과 회사(일) 사이에 부재하는 거리를 환기시키며, 회사(일)의 부정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뤄져온 삶을 깨닫게 한다고 말하는 점에 이르러 쾌감을 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그들은 <달까지 가자>(장류진, 창비)를 읽는다. 장류진 소설 속 가학성과 원한 감정을 두고 한 사람이 도구성 합리성으로 무장된 존재들의 자기계발 서사라는 독해를 제시하면, 그 독해를 뒤집어 그것은 가혹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태도이자 젠더적으로 위계화된 현실에 대한 복수라는 독해가 덧대어진다.
소설의 해설자에게 해갈되지 않는 의문을 건네고, 그 의문에 적극 마주하는 대화를 바라보며… 제발 한없이 문학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고 무한히 그 대화를 듣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이 대화들은 정말로 ‘대화’다. 내밀한 속내를 꺼내놓고, 상대의 말을 듣고, 나를 바꾸는 과정으로서의 대화.
그렇게 그들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서영채, 나무나무)을 경유해 한국인의 마음속 기원으로서 ‘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각자의 관점에서 타당성을 논하고, 한국인(한국문학)에게 과연 초월성과 영원성에 대한 감각이 부재하는지 격렬한 토의를 이어가며, 정치적 올바름과 캔슬 컬처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어 허구(소설)가 서로에게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삶의 이력을 털어놓는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문학과 삶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이 내게는 삶의 앞에서 문학의 쓸모를 되새기게 해서 오래 울컥하고 든든했다. 때로 어쩌면 나는 나와 같은 사람만을 갈구하는 것 같다는 부끄러운 반성이 들곤 한다. 그건 자기애라기보다도 그냥 피곤한 걸 피하고 싶은 마음일 것 같아서. 그러니 같은 책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은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이 둘은 대화를 한다. 저는 아무래도 다른 생각입니다, 라고. 그리고 상대방은 그 의견을 듣고 자기 생각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야말로 나한테 제일 시급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딪히는 것, 깨져버리는 것, 때로는 굴하지 않고 내 의견을 밀어붙여보는 것, 긍정이냐 부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피하지 않고 당신의 눈을 들여다본 채.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어깨가 긴장된다. 기억하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그 책에 다른 책을 겹칠 준비로. 하지만 문학 이야기는 즐거운 동시에 무척 괴롭고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때로 그것은 그저 추천에 그치지 않고 투쟁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연약하니까.
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편집자로 일하다보면 서로 다른 취향끼리 격돌하는 순간을 자주 맞이한다. 내 취향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는 작품을 남에게 설득해야 하는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내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투사의 태도로 임하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꺾일 때 가장 많이 배우기도 했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장정일·한영인, 안온북스)를 읽었을 때 그 진리를 새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도서 없이 ‘오로지 본문만 읽는다’, 줄여서 ‘오본’이라는 독서모임을 시작한 장정일 작가와 한영인 평론가는 문학 이야기를 메일로까지 이어간다. 그리고 그 “혼자 보는 게 아까울 정도였”던 편지들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이다.
첫 편지에서 자본 앞에서 한없이 격하되는 노동의 현실을 절박하게 환기하는 소설 <9번의 일>(김혜진, 한겨레출판)을 장정일이 추천하고, 이에 한영인이 이 소설이 일반적인 노동소설의 문법을 탈피하면서도 숙명적인 부정성과 패배주의적인 세계관이 다소 짙다는 지적을 했을 때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 편지에서 장정일이 소설의 그 니힐리즘적 관점은 주인공과 회사(일) 사이에 부재하는 거리를 환기시키며, 회사(일)의 부정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뤄져온 삶을 깨닫게 한다고 말하는 점에 이르러 쾌감을 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그들은 <달까지 가자>(장류진, 창비)를 읽는다. 장류진 소설 속 가학성과 원한 감정을 두고 한 사람이 도구성 합리성으로 무장된 존재들의 자기계발 서사라는 독해를 제시하면, 그 독해를 뒤집어 그것은 가혹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태도이자 젠더적으로 위계화된 현실에 대한 복수라는 독해가 덧대어진다.
소설의 해설자에게 해갈되지 않는 의문을 건네고, 그 의문에 적극 마주하는 대화를 바라보며… 제발 한없이 문학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고 무한히 그 대화를 듣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이 대화들은 정말로 ‘대화’다. 내밀한 속내를 꺼내놓고, 상대의 말을 듣고, 나를 바꾸는 과정으로서의 대화.
그렇게 그들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서영채, 나무나무)을 경유해 한국인의 마음속 기원으로서 ‘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각자의 관점에서 타당성을 논하고, 한국인(한국문학)에게 과연 초월성과 영원성에 대한 감각이 부재하는지 격렬한 토의를 이어가며, 정치적 올바름과 캔슬 컬처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어 허구(소설)가 서로에게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삶의 이력을 털어놓는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문학과 삶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이 내게는 삶의 앞에서 문학의 쓸모를 되새기게 해서 오래 울컥하고 든든했다. 때로 어쩌면 나는 나와 같은 사람만을 갈구하는 것 같다는 부끄러운 반성이 들곤 한다. 그건 자기애라기보다도 그냥 피곤한 걸 피하고 싶은 마음일 것 같아서. 그러니 같은 책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은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이 둘은 대화를 한다. 저는 아무래도 다른 생각입니다, 라고. 그리고 상대방은 그 의견을 듣고 자기 생각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야말로 나한테 제일 시급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딪히는 것, 깨져버리는 것, 때로는 굴하지 않고 내 의견을 밀어붙여보는 것, 긍정이냐 부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피하지 않고 당신의 눈을 들여다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