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에서 근무하는 A사무관은 기재부 안팎에서 내로라하는 에이스 공무원으로 손꼽힌다. A사무관의 ‘필살기’는 보고서 작성 능력. 덕분에 경제정책방향을 비롯해 각종 핵심 보고서를 도맡아서 작성한다. 차관보 등 상사들로부터 ‘웬만한 고참 과장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다 보니 주위의 시샘을 살 정도다.

비결이 뭘까. 무엇보다 복잡한 각종 현안도 압축·정리해서 보고서 한 장으로 정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 상사들의 공통된 평가다. 한 국장급 간부는 “통상 작성자가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할 때 보고서 분량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보고서 한 장에 핵심 내용만 담으려면 현안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공무원을 비롯한 직장인들에게 보고서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보고서로 인한 공무원들의 스트레스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각종 현안 및 관계부처와의 협의가 많은 기재부에서 보고서 작성 능력은 해당 직원의 업무역량을 평가하는 핵심 척도라는 것이 공무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통상 보고서 초안 작성은 실무 사무관들의 몫이다. 사무관이 담당 과장과 국장에게 보고서를 올리면, 국장은 장관에게 보고하는 식이다.

올해부터 대통령실을 시작으로 각 부처에서 ‘쉽고 간단한 보고서’를 강조하면서 사무관들의 보고서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기자단에 배포하는 보도자료도 한 장짜리인 경우가 많다. 자세한 내용을 별첨으로 정리하고, 보도자료 원문은 한 장으로 압축해 만드는 식이다.

상사들이 평가하는 훌륭한 보고서의 기준은 뭘까. 기재부의 한 실장급 간부는 “부총리나 차관이 보고서를 읽자마자 1분 만에 내용을 금방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통상 하루 일정이 분 단위로 짜인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경우 실무진들로부터 현안에 대해 보고받는 시간은 길어야 15분을 넘지 않는다. 부총리뿐 아니라 1·2차관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건 마찬가지다.

빡빡한 시간에 현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쉽고 간단한 보고서’가 필수라는 얘기다. 한 국장급 간부는 “특정 현안에 대해 중학생들이 쓰는 용어만으로도 보고서를 작성해 짧은 시간에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고 밝혔다. 다만 보고서 곳곳이 어려운 용어로 채워진 채 형식만 ‘있어 보이게’ 만든 보고서도 적지 않다는 것이 간부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특히 부총리와 차관에게 ‘직보’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일부 국에서 이런 보고서가 자주 만들어진다고 했다.

다른 국장급 간부는 이처럼 내용이 어려운 보고서를 받으면 초안을 작성한 사무관을 불러 직접 현안에 대해 질문을 한다. 이른바 ‘스무고개 질문’이다. 통상 서너번째 질문에서 답변이 막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간부는 “보고서가 어렵다는 건 본인도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국장급 간부는 보고서를 쓰기 전에 사무관들에게 편하게 대화하듯이 현안에 관해 설명해 보라고 한다. 이 간부는 “상대방과 편하게 대화하듯이 현안에 관해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쉽고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사무관들은 죽을 맛이다. 한 MZ세대 사무관은 “보고서를 쉽고 간단하게 쓰기 위해 내용을 제대로 숙지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면서도 “스무고개 질문을 하면 어느 국·과장 누구도 스무번째 질문까지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중간 간부인 과장들과의 미묘한 신경전도 곳곳에서 벌어진다고 했다. 한 사무관은 “과장이 보고서 초안을 직접 뜯어고쳤는데, 정작 국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혼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며 “차라리 과장을 거치지 않고 국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편할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