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차단제가 면역항암제 성능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수잔 케이치 미국 솔크연구소 교수(왼쪽)와 애나-마리아 글로빅 박사후연구원. 솔크연구소 제공
베타차단제가 면역항암제 성능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수잔 케이치 미국 솔크연구소 교수(왼쪽)와 애나-마리아 글로빅 박사후연구원. 솔크연구소 제공
항암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병용요법이 연구되는 가운데 고혈압 치료제인 베타차단제를 병용투여하면 면역항암제의 성능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간 면역항암제의 효과를 보지 못했던 환자들에게 개선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는 항암치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이번 연구에서 증명됐다. 미국 솔크 연구소와 국립보건원(NIB) 등 공동연구진은 암세포를 죽이는데 특화된 T세포가 베타-1 아드레날린 수용체(ADRB1)를 통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노르아드레날린과 결합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9월 20일자에 발표했다.

특히 일정 시간이 지나 활성도를 잃은 T세포일수록 ADRB1을 더 많이 발현했고 그 결과 암세포 대신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신경세포 주위에 모였다. 환자의 면역력을 강화해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하는 3세대 면역항암제의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대로 연구진이 ADRB1를 차단하는 베타차단제를 처리하자 T세포가 더 오랫동안 암세포를 죽이는 기능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T세포의 활성 지속시간은 항암제의 성능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논문의 제1저자인 애나-마리아 글로빅 솔크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신경세포가 암 조직에서 면역반응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베타차단제를 활용해 지치지 않고 암세포와 더 잘 싸울 수 있는 T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향후 신경계가 T세포 성능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암세포 파괴 성능을 잃은 T세포의 미세환경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글로빅 박사후연구원은 "신경계가 암세포에 작용하는 면역 반응을 어떻게 억제하는지, 성능을 잃은 T세포가 신경세포로 향하는 이유를 밝히면 치료제로 개발될 타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타차단제가 흑색종·난소암 환자 생존율 높여

베타차단제는 노르아드레날린이 ADRB1에 작동하는 것을 차단해 심장 박동수를 줄이는 약물로 고혈압이나 심부전증 치료제로 활용된다. 베타차단제가 면역항암제의 성능을 높일 수 있다는 단서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나왔다.

201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종양면역학에서 베타차단제와 면역항암제를 병용하면 흑색종 환자의 5년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2000~2015년 흑색종 환자 195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베타차단체를 복용한 환자의 5년 생존률은 70%인 반면 선택적 차단제만 복용하거나 아예 복용하지 않은 환자는 25%였다. 조셉 드라빅 펜실베니아주립대 의대 교수는 "베타차단제로 환자의 생리적 스트레스를 줄이면 환자의 면역요법과 생존율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분석했다.

앞서 2015년 미국 텍사스대 MD 앤더슨 암센터 연구진도 베타차단제 약물을 복용했던 난소암 환자들이 전체 환자군 중 가장 생존기간이 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 네이처 연구 성과는 그간 현상 분석에 그치던 베타차단제 병용요법의 효과를 분자생물학적 수준에서 밝혔다는데 의의가 있다. 향후 베타차단제를 기존 면역항암제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병용요법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베타차단제는 이미 상용화돼 있어 역사적으로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강점이 있다.

수잔 케이치 솔크연구소 교수는 "면역항암제는 암 치료에 혁명을 일으켰지만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는 환자가 많다"며 "(이번 연구 성과로) 암세포를 파괴하는 T세포가 오랫동안 성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고 말했다.

이영애 기자 0ae@hankyung.com

**이 기사는 2023년 9월 21일 09시 37분 <한경 바이오인사이트> 온라인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