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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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가 기후위기 대응 정책의 속도를 조절한다. 당초 2030년으로 설정한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 시기를 5년 늦추기로 했다. 2019년 주요7개국(G7) 가운데 최초로 '2050년 탄소중립(넷 제로)' 목표 법안을 법제화했던 영국이 친환경 드라이브에서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20일(현지시간) "휘발유·경유차의 신차 판매 금지 시기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5년 미룬다"고 발표했다. 또 "그 이후에도 휘발유·경유차 중고차 거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2050년 탄소중립 목표는 유지하되 영국 가계가 치솟는 물가상승률로 생활비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 실용적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수낵 총리는 "2035년 타임라인은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연합(EU) 국가들과 미국의 캘리포니아, 뉴욕 등 일부 주와 같은 일정"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이와 더불어 주택 가스보일러를 단계적으로 퇴출시키는 계획을 완화할 방침이다. 영국 국민들에게 히트펌프로 전환하는 방안을 서두르도록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수낵 총리는 이어 "이번 조치는 기후변화 정책에 물타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며 "두바이에서 개최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도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전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채 기후위기 대응 속도를 너무 빠르게 설정해놨다"며 "이대로라면 대중의 반발로 인해 목표 자체를 이룰 수 없게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단체와 야당은 물론 여당인 보수당에서도 즉각 비판이 터져나왔다. 2020년 당시 총리였던 보리스 존슨이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시기를 2030년으로 지정하는 등 환경 어젠다는 보수당의 유물이라는 점에서다. 영국 정부의 정책 기조에 맞춰 전기차 생산에 투자한 자동차 업계 일각에서도 반발이 제기됐다. 미국 포드사의 영국 대표는 "우리는 영국 정부로부터 야망, 약속, 지속성 세 가지를 원하는데 이번 조치는 모두 이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수낵 총리가 내년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승부수를 띄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수낵 총리가 기후변화 대응 속도를 늦추면 내년으로 예상되는 총선에서 부동층을 잡을 수 있다고 보고 베팅을 한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로 올해 7월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보수당이 예상과 달리 승리를 거둔 뒤로 수낵 총리 행정부는 기후변화 대책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선거에서 노동당 소속인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의 초저배출구역(ULEZ) 확대 정책을 비판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것이 선거 승리 요인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초저배출구역은 배기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노후 공해 차량 이용을 억제하는 제도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