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 북 꾀꼬리, 2021-2023, 3채널 비디오, 컬러, 소리 사진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버들 북 꾀꼬리, 2021-2023, 3채널 비디오, 컬러, 소리 사진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열한 번째 광주비엔날레가 열린 2016년. 해외 갤러리와 미술관들은 한 30대 한국 여성 작가의 작품을 보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추상미술의 대안을 제시했다”, “미니멀리즘의 완벽한 재해석”이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2년 뒤 이 작가의 작품은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2018년 미국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상하이비엔날레와 리버풀비엔날레에 초청받았다. 같은 해 아트바젤에서 ‘발로아즈 예술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엔 베네치아비엔날레 본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하는 영예도 따랐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꽃이 만개한, 화양연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짙은 어둠이 그에게 찾아왔다. 암 판정을 받았고, 그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작가 강서경.
작가 강서경.
그 작가의 이름은 강서경(46). 3년간 암과 싸우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M2에서 ‘버들 북 꾀꼬리’로 우리를 다시 찾았다. 지난 6일 개막한 강서경의 이 전시는 그야말로 지독한 병과 싸운 작가 자신의 기록이자 사투의 결과이기도 하다. 작품의 90%는 신작. 그동안 연 전시 중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시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작가는 말한다. “스스로에게, 관객들에게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3년을 기다린 리움, 죽어라 작업한 강서경
정井 버들 #22-01, 2020-2022, 가변 크기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정井 버들 #22-01, 2020-2022, 가변 크기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리움미술관은 2020년 재개관을 1년 앞두고 강서경 작가와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리소문 없이 잠정 중단됐던 이 전시는 그래서 더 각별하다. 리움이 개관 20년간 미술관에서 국내 생존 작가의 개인전을 연 건 서도호, 양혜규, 김범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그의 전시 소식이 알려지자 이름 석 자만으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보테가베네타는 전시 후원을 전격 결정하기도 했다. 전시 개막에 앞서 하얗게 센 머리로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강 작가는 “예전엔 검고 숱 많은 머리였는데, 암 투병 이후 검은 머리가 나지를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투병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이날이 처음. 투병 중에도 리움 개인전을 위해 작업을 손에 놓지 않았고, 기자들을 만나기 이틀 전까지도 항암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인생 최정점에 홀연히 사라진 강서경, 암과 싸우며 만든 '꾀꼬리의 세상'
강서경의 작품이 해외 미술계를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작업이 ‘동양화’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면 사실 동양도, 회화도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은 그림보다 조각과 설치 미술에 더 가깝고, 현대미술의 전형적 이미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모든 작업의 시작은 회화다.

강 작가에게 회화는 단순한 평면 작업이 아니다. 그는 “회화란 보이지 않는 사각 공간을 인지하고,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작업”이라며 그림을 공감각적으로 늘이고, 흔들고, 세웠다. 그런 확장의 과정을 통해 조각에 더 가까운 형태로 변형시켰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 미셸 쿠오는 이런 그의 작품을 두고 “회화 같기도, 조각 같기도, 또 실험미술 같기도 한 ‘마성의 매력’이 있다”고도 표현했다.

전통에서 찾은 현대미술의 미래

자세히 감상하다 보면 모든 작품의 기반에는 한국적 요소가 깔린다. 그 전통을 누구보다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는 게 강서경만의 강점이다. 강서경은 서양인들이 가진 틀에 박힌 동양 미술의 범주에서 보란 듯 벗어나 동양의 전통을 가지고 ‘현대의 미’를 요리한다. 해외 전시를 열 때마다 탄성이 터지는 이유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풀어낸 방식이 전형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전시는 매번 충격을 줬다.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강서경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정(井)’, ‘자리’ 그리고 ‘모라’ 연작이다.
정井 버들 #22-01, 2020-2022, 가변 크기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정井 버들 #22-01, 2020-2022, 가변 크기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이번 전시에도 나온 ‘정’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기본 개념으로 여겨지는 사각의 ‘그리드’를 조각 그 자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많은 현대미술 대가가 이 그리드에 매혹됐지만, 강서경에게는 단순 ‘사각형’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 출발점은 그리드가 아니라 ‘정간보’다. 정간보는 세종이 만든 오선지 형태의 악보로, 사각형 속 글자의 위치에 따라 악기 음의 높낮이가 나뉜다. 오선지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한국식 악보’란 얘기다.
자리 #22-01, 2021-2022, 약 5962(H)×351(W)×24(D)cm, 사진 홍철기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제공
자리 #22-01, 2021-2022, 약 5962(H)×351(W)×24(D)cm, 사진 홍철기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제공
강 작가는 2014년 우연히 정간보에 쓰인 ‘쌍화점’의 가사를 본 뒤 사각형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 전통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을 하다 조선시대 1인 궁중 무용 ‘춘앵무(春鶯舞)’에도 매료됐다. 무용수 한 사람이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바닥에 까는 ‘화문석’을 작업에 차용하며 ‘자리’ 연작이 탄생했다. 강서경은 이번 리움 전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자리’를 들고나왔다.
모라 55×65 검정 #01, 2014-2016, 65(H)×55(W)×4(D)cm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모라 55×65 검정 #01, 2014-2016, 65(H)×55(W)×4(D)cm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회화 연작 ‘모라’는 캔버스가 아니라 한지나 비단 위에 먹으로 한 겹 한 겹 색을 입혔다. 유화처럼 색 위에 색을 덮는 느낌 대신 서로 스며들어 새로운 색을 만드는 동양화만의 특징을 재료로써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강서경이 그린 ‘모라’ 27점이 마치 탑처럼 높이 쌓인 채 전시장에 세워졌다.

더불어 함께하는 풍경, 꾀꼬리들의 세상
인생 최정점에 홀연히 사라진 강서경, 암과 싸우며 만든 '꾀꼬리의 세상'
‘버들 북 꾀꼬리’ 전시는 M2전시관 어느 한 곳도 허투루 쓰지 않고 곳곳마다 작품을 펼쳐 놓았다. 한 폭의 산수화처럼 꾸민 곳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신작 ‘산’ 시리즈는 사계절을 모티브로 네 가지 작품이 전시됐는데, 그 높이가 160㎝를 넘기지 않는다.

“원래 작품을 더 넣고 싶었는데, 리움에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렸을 정도죠. 지난 3년은 ‘더불어 함께하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은 시간이었어요. 리움 전시장에서 수천, 수만의 꾀꼬리가 자연 속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어요. 관객들이 산수풍경화 같은 전시관을 지나갈 때 눈높이와 비슷한 크기의 산이 주변을 스치는 느낌을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전시 제목에 쓰인 ‘꾀꼬리’란 곧 ‘인간’을 의미하죠. 수많은 사람이 제가 만든 풍경 안에서 공존하길 바랐습니다.”
산-가을 #21-01, 2020-2021, 약 1283(H)×978(W)×40(D)cm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산-가을 #21-01, 2020-2021, 약 1283(H)×978(W)×40(D)cm 사진 김상태 강서경 스튜디오 제공
핵심 연작인 ‘정’, ‘자리’, ‘모라’도 건축적으로 그 크기가 커지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다. 한 사람의 신체 크기를 넘기지 않았던 이전의 ‘자리’ 연작과 달리 이번 리움에 전시된 자리는 그 경계가 몇 배로 늘었다. “아픈 시간을 겪으며 한 사람의 경계 대신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그가 최초로 선보인 모빌 작업, 투병 중 구상한 새 연작 ‘아워스’에는 작가의 경험이 짙게 녹아 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모빌엔 자유로운 움직임과 공감각적 자극이 극대화됐다. 공중에 매달려 얼핏 위태로워 보이지만 굳건하게 그 무게를 지탱해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마치 그의 지난 시간을 말하듯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