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옥 회장 "안경사 정착 위해 30여년…연말 개관 역사관에 여생 바칠 것"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Zoom In
'안경사의 아버지' 김태옥 시호비전그룹 회장
안경사 제도 도입 이끈 '산증인'
안경사의 날에 특별공로상 수상
무료검안·안경제공 등 나눔 실천
더 많은 사람이 세상을 밝게 보길
'안경사의 아버지' 김태옥 시호비전그룹 회장
안경사 제도 도입 이끈 '산증인'
안경사의 날에 특별공로상 수상
무료검안·안경제공 등 나눔 실천
더 많은 사람이 세상을 밝게 보길
“저를 ‘안경사들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제 손으로 우리나라 안경사 역사를 일궜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김태옥 시호비전그룹 회장(79)은 대한민국 안경업계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안경법 통과, ‘안경사의 날’ 제정에 앞장서며 30년 넘는 세월을 안경사업계의 초석을 다지는 데 바쳤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일 대한안경사협회는 ‘제34회 안경사의 날’을 기념해 김 회장에게 특별공로상을 시상했다. ‘안경에 미쳤다 싶을 정도로 안경만 보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안경사들의 아버지 김태옥 회장을 만났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안경사의 전문화였다. 그가 안경업에 뛰어든 1980년대에는 안경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김 회장은 “안경사라고 하면 그냥 안경을 파는 판매원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안경사가 교육과 훈련을 거쳐 검증된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신념이었다.
그 시작은 안경법 제정이었다. 김 회장이 끈질기게 여야 국회의원들을 설득한 결과 1989년 안경법이 정기국회를 통과했다. 그해 12월 의료기사법개정법률이 공포되면서 안경사 제도가 도입됐다. ‘안경사’라는 직업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 안과의사들의 반발도 강했지만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며 “전문적인 안경사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대학의 안경광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공인 시험을 통과해야 면허증을 받아 안경사로 일할 수 있다. 전국 43개 대학의 안경광학과에서 연간 1500여 명의 안경사를 배출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안경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안경 판매원’에 머물러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안경사는 시력 검안부터 안경 제작까지 전담하는 의료보조인이다. 김 회장은 “안경을 맞추는 일은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 일과 같다”고 강조했다. 그가 운영하는 안경점도 마치 병원처럼 ‘검안-안경 제조’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후배 안경사들도 스스로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줬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김 회장의 신조는 ‘나누는 기쁨, 행복한 세상’이다. 그에게 안경은 시력 보조기구를 넘어 선행의 도구다. 김 회장은 시력 검사를 받고 안경을 맞출 여력이 없는 북한이탈주민, 노인, 저소득층 등 사회 약자들에게 무료 검안 서비스와 안경 제품을 제공하고 있다. 몽골, 캄보디아 등에도 안경테를 기부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눈 건강도 챙기고 있다. 그는 “인간의 감각 중 우리가 가장 의존하는 감각은 시각”이라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세상을 밝게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사비를 들여 안경사 역사관을 짓고 있다. 올해 말 개장을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 안경사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해 후대가 보고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김 회장은 대한안경사협회와 함께 ‘안경사상’도 제정해 이곳에서 매년 시상식을 열겠다는 구상도 세웠다.
이 역사관은 김 회장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는 박물관 뒤에 그가 묻힐 묫자리도 마련했다고 했다. 안경사 역사와 함께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다. 김 회장은 “우연하게 시작한 일인데 안경에 미쳐서 여기까지 왔다. 남은 재산과 여생은 안경사 역사를 기록하는 데 쓰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
김태옥 시호비전그룹 회장(79)은 대한민국 안경업계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안경법 통과, ‘안경사의 날’ 제정에 앞장서며 30년 넘는 세월을 안경사업계의 초석을 다지는 데 바쳤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일 대한안경사협회는 ‘제34회 안경사의 날’을 기념해 김 회장에게 특별공로상을 시상했다. ‘안경에 미쳤다 싶을 정도로 안경만 보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안경사들의 아버지 김태옥 회장을 만났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안경사의 전문화였다. 그가 안경업에 뛰어든 1980년대에는 안경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김 회장은 “안경사라고 하면 그냥 안경을 파는 판매원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안경사가 교육과 훈련을 거쳐 검증된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신념이었다.
그 시작은 안경법 제정이었다. 김 회장이 끈질기게 여야 국회의원들을 설득한 결과 1989년 안경법이 정기국회를 통과했다. 그해 12월 의료기사법개정법률이 공포되면서 안경사 제도가 도입됐다. ‘안경사’라는 직업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 안과의사들의 반발도 강했지만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며 “전문적인 안경사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대학의 안경광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공인 시험을 통과해야 면허증을 받아 안경사로 일할 수 있다. 전국 43개 대학의 안경광학과에서 연간 1500여 명의 안경사를 배출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안경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안경 판매원’에 머물러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안경사는 시력 검안부터 안경 제작까지 전담하는 의료보조인이다. 김 회장은 “안경을 맞추는 일은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 일과 같다”고 강조했다. 그가 운영하는 안경점도 마치 병원처럼 ‘검안-안경 제조’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후배 안경사들도 스스로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줬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김 회장의 신조는 ‘나누는 기쁨, 행복한 세상’이다. 그에게 안경은 시력 보조기구를 넘어 선행의 도구다. 김 회장은 시력 검사를 받고 안경을 맞출 여력이 없는 북한이탈주민, 노인, 저소득층 등 사회 약자들에게 무료 검안 서비스와 안경 제품을 제공하고 있다. 몽골, 캄보디아 등에도 안경테를 기부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눈 건강도 챙기고 있다. 그는 “인간의 감각 중 우리가 가장 의존하는 감각은 시각”이라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세상을 밝게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사비를 들여 안경사 역사관을 짓고 있다. 올해 말 개장을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 안경사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해 후대가 보고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김 회장은 대한안경사협회와 함께 ‘안경사상’도 제정해 이곳에서 매년 시상식을 열겠다는 구상도 세웠다.
이 역사관은 김 회장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는 박물관 뒤에 그가 묻힐 묫자리도 마련했다고 했다. 안경사 역사와 함께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다. 김 회장은 “우연하게 시작한 일인데 안경에 미쳐서 여기까지 왔다. 남은 재산과 여생은 안경사 역사를 기록하는 데 쓰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