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뭔 영화가 이렇게 콩가루고 막장이야?”, “김 감독 현장은 원래 막장에 콩가루야."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거미집’에 등장하는 극 중 고참 배우 오여사(박정숙)의 대사들이다. 전자는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을 재촬영하는 장면에서 바뀐 내용에 어이없는 듯 내뱉은 말이다. 후자는 영화 촬영 현장이 이런저런 일들로 어수선해지고, 촬영이 중단될 위기에 처할 때 다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한다.

김지운 감독, 송강호 주연의 ‘거미집’은 영화를 소재로 한 영화다. 걸작의 열망에 사로잡힌 김 감독(송강호)이 영화제작사 신성필름의 촬영장에서 다 찍었던 영화의 내용을 고쳐 이틀 동안 재촬영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시대적 배경은 한국 영화의 ‘암흑기’로 꼽히는 1970년대 유신체제기(1972년 10월 17일~1979년 10월 26일)다. 유신헌법 발효 1년이 지난 1973년 개정된 영화법으로 유례없이 혹독한 심의·검열이 이뤄졌다. 기존 사전 검열 외에 제작 전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해야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제도도 새로 생겼다.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는 꿈에서 김 감독이 이미 촬영을 마친 ’거미집‘의 달라진 결말 부분을 계속 보면서 괴로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시 찍지 않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대로 찍으면 틀림없이 걸작이 된다. 이걸 알고도 비난이 무서워 외면하면 죄악이 된다.”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김 감독은 이런 혼잣말을 되뇌며 시나리오를 꿈에서 본 대로 고쳐 쓴다.

제작사에 찾아간 김 감독은 이틀만 추가 촬영하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격렬한 반대와 난관에 부딪힌다. 제작사 백 회장(장영남)의 반응이 흥미롭다. “걸작을 왜 만들어요? 그냥 하던 거 하세요. 심의 안 나면 절대로 안 돼요.“ 백 회장 말대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심의다. 문공부 담당자는 김 감독이 수정한 시나리오가 ”반체제적이고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퇴짜를 놓는다.

이때 구세주로 나서는 인물이 이 작품에서 가장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제작사 후계자 신미도(전여빈)다. 시나리오를 읽고 수정한 대로 찍으면 걸작이 탄생할 거라고 확신한 미도는 ”심의에 상관없이 일단 찍고 보자“며 실의에 빠진 감독을 부추긴다.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어렵사리 주연 배우들을 모아 다시 시작된 재촬영 현장은 오여사의 표현대로 ’막장‘이고 ‘콩가루’다. 문공부 검열 담당자들이 난데없이 차례대로 들이닥치고, 일본으로 출장 간 줄 알았던 백 회장도 예고 없이 돌아와 ‘촬영 중단’을 선언하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친다. 여기까진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놓고 보면 그럴듯하다.

극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막장‘ 캐릭터는 신미도다. 이른바 ’유학파‘이자 나이도 젊은 미도는 다른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촬영장을 몰래 빠져나가려 한 주연급 여배우 한유림(정수정)을 붙잡아 구타한다. 또 한유림이 다소 무성의하게 연기 리허설을 하자 그 장면을 연기 경험도 없는 자신이 대신 하겠다며 대역으로 나선다. 김 감독은 이런 온갖 난관들을 뚫고 당초 계획 대로 촬영장을 활활 불태우는 엔딩장면을 일종의 롱테이크 기법인 ‘플랑 세캉스(plan sequence)’로 찍어내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풍자한 블랙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지만, 극 중 백회장이 말한 대로 ”치정극이자 멜로물이자 재난극이자 스릴러” 같은 극 중 흑백 영화 ‘거미집’처럼 어수선하다. 시대를 풍자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소재를 빌려와 희화화한 코믹 드라마에 가깝다. 송강호가 연기한 김 감독이 고(故) 김기영 감독을 모티브로 하고 희화화했다는 논란도 있지만, 신연식의 원래 각본을 김지운 감독이 직접 각색하면서 그런 색깔은 거의 없어졌다.

극 중 영화 ‘거미집’의 일부 내용 정도가 ‘하녀’(1960) ‘화녀’(1971) 등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방직공장에 들어온 여공 한유림이 합창부 선생님 강호세(오정세)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하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런 장면만 제외하면 딱히 김기영 감독을 떠올릴 만한 유사점은 크게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송강호 특유의 어투로 내뱉는 김 감독의 독백 등은 김지운 감독의 지론을 대변한다.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촬영 때 힘들고 어렵게 찍은 에너지가 온전히 화면 속에 들어있다" "관객들은 새로운 걸 원한다. 더 강렬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주 색다른 장면을 만들어야 해”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송강호의 모습에서 당시 시대와 영화계 현실에 대한 고민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1970년대가 아니라 오늘날의 영화감독 같다.

송강호와 극 중 김 감독의 스승이자 멘토로 나오는 신 감독 역의 정우성 등 배우들이 합을 맞추는 앙상블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종잡을 수 없는 신미도 역의 전여빈과 당돌하고 약삭빠른 한유림 역의 정수정 등 ‘스크린 신예’들과 박정숙, 임수정, 오정세 등 베테랑들의 신구 호흡도 잘 맞는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