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대기 중에 오래된 유물처럼 한쪽에 있는 시거잭이 보였다. 내 차의 구성품이면서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그것에 괜한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이러저리 돌려보다 쑥 뽑았다. 신호가 바뀌길래 출발하려 손을 바꾸다 그것의 앞부분을 만졌다. 그렇게 손가락 끝에 화상을 입었다.

목적지까지는 30분이 남았고, 출근길은 타인의 고통에 최대한 무심한 채로 본연의 체증에 최선을 다했다. 손가락이 아팠다. 온 신경이 손가락에 쏠렸다. 붉은 기포가 올라온 손끝이, 내 인생의 전부 같았던 30분이었다.

출근 이후 바로 병원에 갔다. 며칠 통원치료 끝에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물었고, 이제 내 몸과 마음은 손가락을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 중에 어느 손가락이 그때 그 고통의 손가락이었는지 대답하려면, 한참 기억을 더듬어야 할 정도다. 그 고통은 지나갔으니까, 지금 나에겐 다음의 고통이 가장 크니까. 몸이든 마음이든, 혹은 고통이 잠시 사라진 지금 상황에 대한 불안이든.

고통에 대해 길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고통이라는 것은 원래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고통이 엄습하면 우리의 생각은 그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는 데 집중된다. 상처를 문지르고, 약을 바르고, 진통제를 먹는다. 술을 마시고, 수면제를 복용하고, 상담을 받는다.

고통받고 있다면, 고통이 그의 전부이다. 고통은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그에게는 그의 고통이 절대적이며, 타인의 고통에는 상대적인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 상대적 고통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의사가 1에서 10까지 중에 통증의 수치가 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사실 고통에 대한 모든 질문이 그렇다. 이 고통은 얼마만큼인가? 이 고통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고통의 정체는, 도대체 무언가?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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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는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 ‘NSTRA-14’로 인해 고통이 사라진 세계의 이야기다. 고통이 사라지니 고통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며,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는 종교가 생겨난다. 그들은 제약회사를 테러한다. 무고한 사람이 죽었지만 제약회사는 본거지를 바꾸었을 뿐이고, 약은 전과 같이 생산된다.

이후 잠잠해진 교단에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피해자의 몸에서는 잔혹한 고문과 과다 복용한 약물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범인은 흔적이 없다. 유력한 용의자가 구치소에서 살해되었지만 CCTV조차 범인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사람의 눈이나 기계장치로는 발견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
고통에 관하여 표지
고통에 관하여 표지
고통을 없애려는 자, 고통을 갈구하는 자, 고통이 상관없는 자, 고통을 궁금해하는 자 모두 각각의 고통에 구속되어 있다. 부모에게 학대당하거나 소수자로서 차별받거나 예측되는 고통에 미리 두려워한다. 누구도 고통을 벗어날 수 없고, 고통과 동반하여 살아왔기에 우리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고통의 삶의 동력이며 고통은 삶의 필수요소가 되는 것이다.

정보라의 소설은 고통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고통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단언하지는 않지만 대신 꼭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고통스럽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에 관하여>를 읽으며 그때 다쳤던 손가락의 지문을 살펴보았다. 사라진 고통 대신 새로 돋아난 살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통은 지문처럼 각각의 문양으로 우리 삶에 남겠지만, 소설은 그 삶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존엄을 지켜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그 메시지에 위로를 받는다. 지금 당신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 당신은 존엄할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소설 거의 모든 페이지에 줄을 그어도 모자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