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서울 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서울 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백현동 개발 특혜 및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 관련 구속 영장이 27일 새벽 기각됐다. 체포동의안의 국회 본회의 가결 이후 정치 인생 최대 고비를 맞았던 이 대표는 일단 기사회생했다. 반면 구속을 자신하던 검찰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통해 이 대표의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장기전’을 치루게 됐다.

유창훈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2시 26분께에 이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유 부장판사는 “위증교사 혐의가 소명된 것으로 보이지만, 위증교사 및 백현동 개발사업의 경우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9시간 17분간의 심문을 마친 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던 이 대표는 판결 후 치료를 받던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으로 돌아갔다.

이 대표측은 이날 심문에서 자신에게 적용된 배임(백현동 개발 특혜), 뇌물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쌍방울그룹 불법 대북송금), 위증교사(검사사칭사건 재판 관련) 혐의사실이 모두 다른 사람의 진술과 정황에 의존한 ‘소설’이라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는 심문 중 변호인의 설명에 대해 보충 발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을 항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1600여쪽 분량의 의견서와 500장 분량의 프리젠테이션(PPT)을 앞세워 공세를 펼쳤지만 이 대표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구속 위기에서 벗어난 이재명 대표는 검찰과의 법정 대결을 준비하면서 민주당의 총선 준비를 지휘하는 이중 임무를 안게 됐다. 정치권에선 이 대표가 지도부를 장악한 자신의 측근 그룹을 활용해 체포동의안 가결을 주도한 비명계를 숙청하는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이 대표의 측근 그룹인 친명계(친이재명계)는 이날 원내대표에 홍익표 의원을 당선시킨데 이어 교체가 예정된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겨냥하고 있다.

구속 모면한 李, 내달 당무 복귀

구속 위기에서 벗어난 이재명 대표는 다시 녹색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이어간다. 본격적인 당무 복귀는 추석 연휴 이후로 예상된다.

구속영장이 기각된 건 이 대표가 원내 제1당 대표로서 도주 우려가 없는데다, 검찰이 제기한 혐의 대다수에 이 대표가 이익을 취했거나, 직접적으로 개입한 증거가 없다는 변호인단의 논리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인단은 검찰이 제기한 증거 인멸 우려에 대해 “이미 수백회 이상의 압수수색과 참고인 조사가 이뤄진 만큼 인멸할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 변호를 맡은 박균택 변호사는 영장심사 종료 후 기자들을 만나 “2개 검찰청이 1년 반에 걸쳐 200회 이상의 압수수색과 광범위한 수사를 해왔기에 인명할 증거가 없으며, 법리상 죄가 인정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인멸의 우려까지 갈 필요조차 없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법원은 이같은 주장을 상당부분을 받아들여 이 대표를 구속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심문을 맡은 유창훈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백현동 개발 사업의 경우 피의자의 지위와 관련자들의 진술 등을 종합할 때 피의자의 관여가 있었다고 볼 의심이 들긴 하나, 직접 증거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비명 숙청 우려 속 분당론 부상

이 대표는 당무에 복귀하는대로 탕평 차원에서 비명계에 배분됐던 지도부 보직을 친명계로 대체하는 작업에 나설 전망이다. 현재 조정식 사무총장과 김민석 정책위의장을 비롯해 당 사무국 소속 모든 정무직 당직자는 사표를 제출한 상태다. 최고위 내 유일한 비명계 임명직 최고위원이었던 송갑석 의원도 지난 23일 사의를 표명했다. 야권에선 이재명계가 지도부와 원내사령부 양쪽을 독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다음달부턴 강성 지지층의 손을 빌려 비명계에 대한 본격적인 ‘청산 작업’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민주당은 10월부터 11월까지 국회의원 평가를 진행하고 12월부터는 공천관리위원회를 가동한다. 의원 평가와 경선 등 공천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권리당원들의 평가가 큰 비중으로 반영된다.이 대표의 강성 지지자 그룹인 ‘개딸’들은 벌써부터 설훈·이원욱·조응천 등 주요 비명계 의원들에 대한 ‘살생부’를 작성하며 경선 낙선 운동을 예고하고 있다.

비명계 의원들 사이에선 조금씩 생존전략이 논의되고 있다. 비명계 가운데 과거 친문(친문재인)계로 분류됐던 의원들 일부가 탈당해 신당 소속으로 총선을 치를 것이라는 소규모 분당 시나리오가 대표적이다. 한 비명계 초선 의원은 “계파 갈등이 극단적인 상황까지 진행돼 분당이 이뤄진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의 후광에 기댈 수 있는 친문계가 구심점이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주당, 대여 강경 투쟁 단일대오 나선다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의 대(對)정부·여당 투쟁 강도는 더욱 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이 이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적 제거를 위한 정치 탄압’으로 규정한 가운데, 이 대표가 구속 갈림길에서 기사회생하면서 여야의 강대강 대치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 동의안 처리와 신임 장관 후보자 3명에 대한 인사청문회 개최, 민생 법안 처리 등이 줄줄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은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가결을 계기로 친명(친이재명)계 중심으로 지도 체제를 정비했다. 정부·여당을 상대로 한 강경 투쟁을 위한 단일대오를 갖췄다. 최고위원회는 비명(비이재명)계인 송갑석 최고위원이 사퇴해 친명계인 정청래·서영교·박찬대·장경태·고민정·서은숙 최고위원이 남았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고 최고위원은 비명계로 분류돼 왔지만 최근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 때 부결표를 던졌다고 공개 선언하며 친명계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저녁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저녁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체포동의안 가결 사태의 책임을 물어 친명계가 끌어내린 박광온 원내대표 후임에는 친명계 3선인 홍익표 의원이 선출됐다. 홍 신임 원내대표는 “윤석열 정권의 무능과 독선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국민의 삷이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다”며 현 정부에 각을 세웠다. ‘민주주의 후퇴’는 이 대표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가며 내세운 명분이다.

구속 위기를 모면한 이 대표와 이 대표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친명계 중심의 민주당 지도부 등장은 산적한 민생 법안 처리를 지연시킬 가능성이 있다. 여야는 지난 21일 본회의에서 실손의료보험 수급 간소화법(보험업법 개정안), ‘머그샷 공개법’(특정중대범죄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법), 보호출산법 등 90여개 법안을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무산됐다. 이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표결도 지연되면서 사법부 수장 공백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은 “당장 우리 앞에는 30년 만의 대법원장 공석 사태부터 보호출산 특별법과 같은 민생법안까지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며 “홍 원내대표 선출을 계기로 21대 국회가 정쟁에서 벗어나 민생을 위해 협치하는 모습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범진/한재영/박시온/원종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