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지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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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내가 중학교 다니던 때 추석날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상차림을 두고 크게 다퉜다. 끝내 차례를 모시지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설된 차례상을 점검하던 큰아버지가 “배는 왜 안 올리느냐?”고 했다. 독촉하는 큰소리가 나자 배 한 개를 담은 접시가 상에 받쳐 들여왔다. 큰아버지는 대뜸 “왜 한 개냐”고 했고, 더 큰소리가 나자 큰어머니가 세 개 중 하나가 썩은 게 있어 빼다 보니 홀수를 맞춰야 해 하나만 올렸다고 설명했다. 큰어머니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책하는 더 큰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얼른 중재에 나섰다. “괜찮습니다.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또 어떻습니까. 썩은 놈을 도려내려면 배 세 개를 모두 그만큼 도려내고 상에 올리면 되잖아요”라며 말을 거들었다. 큰아버지는 바로 “정신 나간 소리”라고 일축하며 당장 배를 구해다 상을 올바르게 차리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아버지는 전통은 상황에 따라 변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절충안으로 사과와 배, 감을 모두 한 개씩만 놓자고도 했으나 큰아버지는 “차례는 정성이다. 정성을 들이지 않은 차례는 안 지낸다”라며 건넌방으로 나가버렸다.
화난 아버지는 집에 가자며 따라나서라고 엄명했다. 해가 이제 막 뜨는 동네를 벗어나며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는 혼잣말해댔다. “형편이 닿지 않으면 종이에 ‘배’라고 써서 올리거나 물만 떠놓고도 지내면 되는 거다. 배가 안 나는 지방에서는 상에 올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집에 와서 아버지가 길게 설명한 과일을 상에 올리는 이유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을,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이 들어있어 삼정승을 뜻하며 후손이 공경받는 인물로 자라기를 바람을 담아 올린다. 씨가 6개인 배는 6조 판서를 뜻해 무슨 일을 해도 잘 하기를, 감은 씨가 8개여서 8도 관찰사를 상징한다. 어느 곳에서도 제 뜻을 펴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아 그렇게 올리는 속설(俗說)이 있다. 이들 과일을 상에 올리게 된 것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주자가례 등 모든 예서(禮書)에 올릴 제물의 구체적인 명칭이 없다. 지역 산물을 중심으로 제사상을 차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율이시나 홍동백서 등의 근거 또한 명확하지 않다. 근대 이후 민간에서 생겨난 거다”라며 “선조들이 드시던 음식과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음식이 다르듯 제례 전통도 바뀌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 역정은 십분 이해한다. 우리 집안이 이조판서 후손이라 배가 상했다는 말에 신경이 곤두선 거 같다”고 했다. 이어 옛 얘기를 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한 선비가 같이 공부하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마침 제삿날이라 지켜보니 진설한 과일들의 위치가 이상했다. 선비는 ‘조율시이’라고 했고, 친구는 ‘조율이시’가 맞다고 우겼다. 판서 집안 후손은 배를, 관찰사 집안은 감을 먼저 놓는 상차림이 다른 데서 온 촌극이다.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속담은 그래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집안마다 진설법이 다르다며 성어 ‘가가례(家家禮)’를 알려줬다. ‘가례(家禮)’를 재해석해 약 200종의 예서가 출간된 것을 보면 그만큼 이견이 많았다. 실정에 맞게 재해석해 학파, 집안, 지역에 따라 다른 예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예서가 행례의 기본 원칙만 기술하고 세부 항목 설명이 없어 집단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다른 변례(變禮)가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되면서 가가례로 고착되었다. 아버지는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변용할 수 있다. 지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라고 강조했다.
몇 해 전에 한 신문이 추석 차례 설문조사를 했다. 차례를 지내는 집과 지내지 않는 집의 비율이 53대 47이었다. 지내지 않는 집의 21%는 오래전부터 안 지낸다고 했고, 26%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용기를 얻어 십여 년 넘게 지내오던 아버지 제사를 없애버렸다. 우리집의 또 다른 가가례다. 준비하는 번거로움도 있긴 하지만 후손의 참석률이 저조해서다. 전통이란 단순한 전승이나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탄생과 인격의 형성을 뜻한다는 자각이 있어서다. 고집도 중요하지만 사고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그 또한 손주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품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아버지가 얼른 중재에 나섰다. “괜찮습니다.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또 어떻습니까. 썩은 놈을 도려내려면 배 세 개를 모두 그만큼 도려내고 상에 올리면 되잖아요”라며 말을 거들었다. 큰아버지는 바로 “정신 나간 소리”라고 일축하며 당장 배를 구해다 상을 올바르게 차리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아버지는 전통은 상황에 따라 변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절충안으로 사과와 배, 감을 모두 한 개씩만 놓자고도 했으나 큰아버지는 “차례는 정성이다. 정성을 들이지 않은 차례는 안 지낸다”라며 건넌방으로 나가버렸다.
화난 아버지는 집에 가자며 따라나서라고 엄명했다. 해가 이제 막 뜨는 동네를 벗어나며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는 혼잣말해댔다. “형편이 닿지 않으면 종이에 ‘배’라고 써서 올리거나 물만 떠놓고도 지내면 되는 거다. 배가 안 나는 지방에서는 상에 올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집에 와서 아버지가 길게 설명한 과일을 상에 올리는 이유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을,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이 들어있어 삼정승을 뜻하며 후손이 공경받는 인물로 자라기를 바람을 담아 올린다. 씨가 6개인 배는 6조 판서를 뜻해 무슨 일을 해도 잘 하기를, 감은 씨가 8개여서 8도 관찰사를 상징한다. 어느 곳에서도 제 뜻을 펴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아 그렇게 올리는 속설(俗說)이 있다. 이들 과일을 상에 올리게 된 것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주자가례 등 모든 예서(禮書)에 올릴 제물의 구체적인 명칭이 없다. 지역 산물을 중심으로 제사상을 차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율이시나 홍동백서 등의 근거 또한 명확하지 않다. 근대 이후 민간에서 생겨난 거다”라며 “선조들이 드시던 음식과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음식이 다르듯 제례 전통도 바뀌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 역정은 십분 이해한다. 우리 집안이 이조판서 후손이라 배가 상했다는 말에 신경이 곤두선 거 같다”고 했다. 이어 옛 얘기를 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한 선비가 같이 공부하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마침 제삿날이라 지켜보니 진설한 과일들의 위치가 이상했다. 선비는 ‘조율시이’라고 했고, 친구는 ‘조율이시’가 맞다고 우겼다. 판서 집안 후손은 배를, 관찰사 집안은 감을 먼저 놓는 상차림이 다른 데서 온 촌극이다.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속담은 그래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집안마다 진설법이 다르다며 성어 ‘가가례(家家禮)’를 알려줬다. ‘가례(家禮)’를 재해석해 약 200종의 예서가 출간된 것을 보면 그만큼 이견이 많았다. 실정에 맞게 재해석해 학파, 집안, 지역에 따라 다른 예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예서가 행례의 기본 원칙만 기술하고 세부 항목 설명이 없어 집단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다른 변례(變禮)가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되면서 가가례로 고착되었다. 아버지는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변용할 수 있다. 지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라고 강조했다.
몇 해 전에 한 신문이 추석 차례 설문조사를 했다. 차례를 지내는 집과 지내지 않는 집의 비율이 53대 47이었다. 지내지 않는 집의 21%는 오래전부터 안 지낸다고 했고, 26%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용기를 얻어 십여 년 넘게 지내오던 아버지 제사를 없애버렸다. 우리집의 또 다른 가가례다. 준비하는 번거로움도 있긴 하지만 후손의 참석률이 저조해서다. 전통이란 단순한 전승이나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탄생과 인격의 형성을 뜻한다는 자각이 있어서다. 고집도 중요하지만 사고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그 또한 손주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품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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