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환영> - 슈만의 작품 17 판타지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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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동조의 나는 무대감독입니다
1악장
라! 내 사랑, 솔! 내 사랑, 파! 내 사랑, 미! 내 사랑, 레! 내 사랑.하행하는 다섯 음에 당신의 이름을 붙이고, 마치 백조의 물속 발질처럼 왼손으로 당신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그대의 이름을 외치며 내 환영을 시작할까 하오.
신부의 자리에 서 있는 당신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소.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고, 자꾸자꾸 슬프기만 한 이 가슴은 마치 한 움큼 엉켜있는 실타래 같소. 깊은 시름, 덧없는 상념, 밑으로, 밑으로만 빠져들어 가는 끝없는 한숨. 이 좋은 날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당신에게 이 무슨 죄인지 모르겠소.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스스로를 다시 다독거리고, 굳건히 이겨내며 버텨온 우리의 지난날, 어려웠기에 더욱 아름다운 우리의 사랑을 상기하오. 예식장의 하얀 공간, 그 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다시 나의 모든 걱정은 날아가는 듯하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콧날, 앵두 같은 입술, 동그란, 동그란 얼굴.
당신은 정말 아름답구려. 하지만, 마치 투명체 같은 당신의 모습은 너무 멀리, 너무 멀리 있는 듯하오.
이런, 나도 모르게 ‘멀리’, ‘멀리’란 표현을 써 버렸구려. 하긴, 어쩌면 이게 지금의 나와 당신의 거리인지도 모르지.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이 현실이 정말 꿈처럼 날아가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득히, 아득히, 당신의 이름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구려. 아마도 이 달콤하고도 쓴 꿈에서 누군가 나를 깨우려고 하는 것 같소. 돌아오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구려. 꿈에서 깨면 더욱 좋아지려나? 아니 더욱 아프기만 하려나?
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당신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있소. 당신에게 들려줄 노래. 조그맣고 자그마한 나의 목소리를 하얀 새의 발목에 묶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노래를 가져가오, 내 사랑.”
2악장
나는 걸어가오! 아주 당당하고, 아주 자신 있고, 아주 늠름하게, 당신을 향해.그대를 향한 나의 걸음걸이로 우리 사랑의 모든 어려움을 날려버리고 싶소.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역경은 그저 한순간의 짧은 시련이었을 뿐이요. 이제 나는 힘을 얻었소. 당신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는 힘.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수 없는 우리의 사랑. 나는 이제 모든 시련을 잊고 오직 당신과의 사랑을 위해 나의 온 힘을 쏟을 결심을 하오.
무척이나 홀가분하구려. 나는 이제 춤을 추오. 상상해 보시오. 신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신랑의 걸음걸이가 춤이라니. 하하!! 재미있지 않소? 하지만 오늘 나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을 향해 난 그리 길지 않은 길을, 구르라면 구르고, 뛰라면 뛰고, 날아가라 해도 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구려.
마치 익숙한 습관처럼 잠시 나의 머리에 또 한 번 슬픈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는구려. 난 아직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했나 보오. 골목길을 뛰어놀다 발목을 다치는 어린아이처럼, 그래서 금세 토라지는 아이처럼 아마도 나는 아직도 그런 사람인가 보오. 하지만, 어찌하겠소? 지금의 우리는 그런 모습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 현실, 마음, 몸, 그 모든 것들.
이제! 이 악몽 같은, 아니 단꿈 같은,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이 지겨운 “꿈” 들은 모두 잊어버리기로 결심하오. 오직 현실 속에서 당신을 향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찾아가겠노라 결심하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늘 고뇌에 쌓여, 스스로 방황하기만 했던 모든 것들은 깔끔히 정리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나의 두 손으로 우리를 위해 축가를 연주하는 그 날을 꼭 보고 말 것이오.
내 사랑!
이제 남자다운 남자가 된 나를 지켜봐 주오.
당신을 향해 늠름하고 거칠 것 없이 달려가는 나를 지켜봐 주오.
한없이 아름다운 당신을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지켜봐 주오.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우리의 사랑을 이루는 그날.
사랑의 이름과 어울릴지는 모르겠소만, 난 꼭, ‘승리’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구려.
3악장
내가 알고 있는 노래 구절을 떠올려보오. starry, starry, starry, starry.당신의 하얀 창가에 자리 잡고 있는 별들은 다양한 색깔을 지닌 듯하오. 그건 마치 하얀 별들에 각양각색의 옷을 입힌 스테인드글라스 같다고나 할까. 별빛이 내려와 자리 잡은 당신의 어깨는 한없이 아름답기만 하구려. 조용한 정적 속으로 당신이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는 내가 사랑을 시작한 그 첫날을 기억하게 해주는 듯하오. 아담한 크기의 대문으로 발을 디디고 들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당신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던 그 기억. 잊을 수 없는, 잊히지 못하는 한 장의 사진처럼 마음과 머릿속에 고이 자리 잡고 있다오. 난 이미 그 모습에, 당신에 대한 사랑을 시작했음을 오늘에야 와서 말할 수 있구려. 십 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그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던 불안과 좌절의 시간이 있었긴 했소만, 당신에 대한 사랑이 변함이 없었음은 오늘로 서로에게 답을 주고 있는 것 같구려.
별이 빛나는 저녁, 음악이 흐르는 이 밤, 신랑과 신부로 확언을 한 여유로운 첫날, 난 당신에게 2가지 절정을 느끼고 싶소. 신혼 첫날 이루는 나와 당신의 육체의 절정이 첫 번째요. 높디높은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듯 느껴지는 당신과 나의 합일은, 어느 순간 육체를 통해 넘어와, 다시 몸 전체의 사랑으로 체화되고, 또 다시 달콤한 사탕 같은 사랑의 맛! 맛! 맛! 으로 느껴지는 절정!!!
담배를 물었소. 이 담배 한 개비는 그런 속된 그림으로 쉽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오. 내 몸으로 느낀 사랑의 절정을, 그 속에 담긴 마치 무한 같은 우리 사랑의 의미를 위해 숨을 다듬는, 그 시간을 채워주는 무엇이오. 몸으로써 느낀 사랑의 절정이, 다시 영혼의 절정을 향해 오르기 위한 준비. 내 몸과 당신의 몸 모든 구석구석 새겨놓은 사랑의 결정들을 불러올려, 기억으로 변하고, 추억으로 새겨지며, 당신과 나눈 사랑의 시간 일거수일투족이 각인되어, 영원으로 변하는 일. 마치 마술 같은 숫자세기 하나! 둘! 셋!.
우리들의 추억, 우리들의 시간, 우리들의 사랑. 그리고 그 총체에 한없는 빛을 내려주고 있는 별^^. 음악회 무대감독을 하며 특별히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음악 작품들이 있다.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번호 17 판타지 역시 그중 하나이다. 올해 개천절에 렉처 콘서트라는 형식으로 피아노 리사이틀을 마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그가 2008년 한국의 첫 내한 공연 후반부 첫 곡으로 선택한 작품이 슈만 판타지였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 그 연주를 듣던 순간이 이 곡과의 사랑에 빠진 결정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랑이 그런 거겠지만 안드라스 쉬프의 슈만 판타지 연주를 찾아 연주회 후 일 년 가까이 그 녹음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무한반복의 청취를 통해 아마 가장 애타게 찾고 싶던 것은 ‘음악이 사랑을 말할 수 있어?’이지 않았을까 싶다. ‘은밀한 연애편지’라든지, ‘라’에서 ‘레’로 내려오는 하행 5도는 클라라 이름의 뒤 두 글자라든지,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음악이라든지,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1악장에서 사용하였으니 ‘멀리 있는 연인’이란 표현에서 이미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든지 등등.
지금에야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번호 17 판타지는 음악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가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다. 아마 시작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을 사랑에 대한 정의. 그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음악과 언어는 애초부터 가능과 불가능이 아닌 경쟁 상대였고, 어쩌면 그 정확함에 대해서 음악이 더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던 것 같다.